수백만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온통 붉은 색이다. 마치 거대한 해일을 연상케 한다. 그 붉은 물결이 대한민국을 뒤덮었다. 엇박자로 이어지는 붉은 함성. ‘대∼한민국’의 연호 속에 열광하는 수백만의 젊은이들.
결국 신화가 탄생했다. 월드컵 4강이다. 붉은 악마의 신화다.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멀리 한반도에 서 탄생한 신화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났다. 그런데도 어제 일 같이 선연하다.
단순한 축제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지나치다. 차라리 집단적 광기였다. 무엇이 그렇게 열광하게 했는가. 축구의 주술(呪術).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 주술이 풀린 현재 더 그런 생각이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이버 공간에 한 피사체가 뜬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여중생의 비참한 모습이다. 이와 함께 서울의 밤거리는 촛불로 뒤덮였다. 붉은 물결이 수만개의 촛불이 된 것이다. 붉은 함성은 반(反)미 구호로 바뀌었다.
붉은 환희와 감동이 순식간에 허연 분노와 증오로 변한 것이다. ‘대∼한민국’이 한국 신세대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으면서…. 그 행간에서 뭔가가 잡힌다. 그렇다. 민족주의다. 오랜 상처에 신음하는 민족주의의 얼굴이 넘실거린다.
내셔널리즘이란 무엇인가. 내 민족을 다른 민족보다 우선한다는 입장으로 보면 된다. 한 전문가의 설명이다.
그러면 이민의 나라 미국에서도 내셔널리즘이란 말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답과 관련해 조지 W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인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적 신조는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의 내셔널리즘은 혈연이 아닌 미국적 민주주의의 이상(ideal)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이 지닌 가치관의 수호가 바로 미국적 내셔널리즘의 표현이란 말이다.
이런 정의를 바탕으로 보면 미국은 내셔널리즘이 팽배해 있는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인들 스스로가 미국 시민임을 자랑스러워하고 미국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그 미국적 가치가 세계의 스탠더드가 될 때 세상은 더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9.11 사태 이후 미국인들은 미국적 가치의 소중함을 더 깨닫고 있다. 미국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미국인이 종전에는 90%였다. 9.11사태 후에는 97%로 늘었다.
미국적 내셔널리즘은 ‘한(恨)의 내셔널리즘’이 아니다. 상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전향적이다. 항상 미래지향적이다. 과거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더 좋아진다는 희망 하에 결코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 고구려…” 하는 식으로 과거의 역사에 오늘을 투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상처로 얼룩진 한국의 민족주의와 그 성격이 판이하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축구열기 속에 나타난 강한 집단주의와 민족주의다.” 4강 신화가 탄생할 때 한 신문에 실린 칼럼 내용이다.
‘붉은 악마’ 신화 탄생 후 한국에서 넘쳐나는 건 민족주의다. ‘민족주의 과잉국가’로 불려질 정도다. 그 현상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심지어 미주 땅에서까지.
그 두드러진 현상이 통일지상주의다. 민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통일 운동에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곧 바로 반(反)통일세력, 반(反)민족주의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현실인 모양 이다.
통일지상주의의 논리는 그리고 이렇게 이어진다. 이 성스러운 운동을 막고 있는 것이 바로 외세다. 한민족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외세다. 그 세력은 일본이었다. 이제는 미국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측면이 분명히 있으니까. 그러나 그 논리에는 교묘한 함정이 장치돼 있다. ‘모든 것은 외세 탓’이라는 ‘한의 민족주의’의 얼굴만 강조되어서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함정이다.
그 상처 뒤에는 또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좌파의 논리가 숨어 있다. 민족주의 과잉현상이 반(反)미주의로 이어지는 건 이로 볼 때 정해진 수순일 수도 있다.
골치 아픈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9.11사태 이후 미국 사회에서 내셔널리즘은 팽배하고 있는데 만만치 않은 기류가 한국서 몰려오고 있어서다. 반(反)미를 근본 정서로 깔고 있는 민족주의다.
또 6월이다. 꿈이 마침내 현실이 됐다. 환희와 감동의 6월이다. 그 너머로 다른 6월이 포개진다. 최루탄 연기가 자욱하다. 독재에 대한 분노와 항쟁의 6월이다. 섬뜩한 공포가 느껴진다. 피 냄새가 진동한다. 동족상잔의 6월이다.
이 6월에 새삼 던지고 싶은 화두가 있다. “코리안-아메리칸이란 과연 무엇인가.”
옥 세 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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