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수다가 ‘거짓말’처럼 떴어요
‘세자매 카드’
아티스트 세 자매가 모여 비즈니스를 차렸다. 피아노를 전공한 뮤지션 반은경(44) 씨, 뉴욕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 강은주(42) 씨, 패션디자이너 박은희(40) 씨, 두 살 터울의 친자매들이 주변의 소박한 삶을 담아 만든,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카드로 주류 문구업계를 바짝 긴장시켰다는 소문에 호기심이 동했다. 2100 N. Main Street. 스튜디오와 갤러리를 겸한 예술가들의 입주촌 LA다운타운 ‘브루어리 아트 콜로니’에 스튜디오 겸 사무실로 자리잡은 ‘은코’(eunco)를 찾았다.
어릴적 아련한 추억·소박한 일상 담아
글과 그림으로 나타낸 ‘사람냄새’ 매력
다운타운 유니온 스테이션과 와이너리를 지나 겨우 찾은 브루어리 옛터. 회색 건물 속 꾸불꾸불 미로 같은 복도를 따라 가느라 바짝 졸아든 마음은 이내 확 트인 실내 나무들을 만나자 뻥 뚫린다.
개념을 벗어난 건물구조 때문에 다시 수 차례의 셀폰 ‘접선’ 끝에야 더듬더듬 찾은 은코에 들어서니 문득 옛 앨범을 들춘 듯 향수가 밀려든다.
오랜 시간을 머금어 누렇게 바랜 세 자매의 어릴 적 흑백사진들과 조카들의 꾸밈없는 표정들, 천상 어머니여야만 할 것 같은 친정 어머니의 자상한 미소, 벽면을 죽 둘러 걸린 둘째 은주 씨의 따뜻하고 편안한 작품들을 보니 이건 비즈니스 현장이 아니라 세 자매가 차 마시고 이야기하며 노는 ‘아지트’라 하는 편이 더 어울리겠다.
1,500스퀘어피트 로프트의 입구에서 계단까지는 벤치와 카드 진열대, 또 차 한잔 할 수 있는 아담한 공간이 있고 중간층 널찍한 작업대는 패킹중인 카드와 기프트 택(gift tags) 등 은코 제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다락 층이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오피스다.
“우리 자매는 늘 편지를 주고받는데 은주는 그 속에 항상 낙서 같은 그림들을 끄적여 보내곤 하거든요, 그 그림 속엔 우리 가족의 추억이 그대로 녹아 있어요. 어머니, 우리들 어린 시절, 조카들의 모습, 조카들의 그림, 함께 봤던 꽃, 낙엽 등등. 그런데 이런 기억은 우리에게만 특별히 있는 게 아닌가봐요.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는 걸 보면요” 큰언니 은경씨의 설명이다.
“은주 언니는 작품을 거창하게 힘들여 하지 않아요. 늘 보면 뭔가 끌쩍끌쩍 휙휙 그려 우리에게 보내주기도 하고요, 그런 와중에 그 일상이 스며든 그림들을 전시하곤 해요. 워낙 성격이 그렇거든요. 본인도, 주위도 늘 편안하게 하고, 사람들을 좋아하고, 또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뭐든 챙기고 퍼줘야 하고… 그대로 작품에 나타나죠” 이번엔 막내 은희씨의 언니자랑이다.
3년 전 세 자매의 이어지는 ‘수다’ 가운데 “이 카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방법 없을까, 돈도 벌어 엄마 꿈도 이루고 말이야”라는 지나가듯 튀어나온 아이디어,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그림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소망으로 2000년 처음 은경씨의 차고에 모여 조촐하게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돌림자 ‘은’을 따 ‘은 컴퍼니’의 약자로 ‘은코’라 이름 붙이고 둘째 은주씨의 작품과 어린 조카들이 그린 그림들을 인쇄해 카드를 만들어 부지런히 패킹하고 쉬핑하기 시작했다.
저들만의 이야기가 어째서 남들 눈에도 친근하게 읽히는 걸까. 은코의 은근하면서 강력한 매력의 바탕은 바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사랑, 배려, 나눔의 정신”이라고 세 자매는 입을 모은다.
어머니 강정원씨는 1976년 이민 오기 전까지 대구동산병원 간호사로서 간호학교와 고아전용 소아과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여러 명의 고아를 자식처럼 키웠단다.
이제는 그 고아들이 장성해 낳은 자녀들이 강씨를 친·외할머니 자격으로 자신들의 결혼식에 청첩하는 등 친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세 자매가 말한 ‘엄마의 꿈’이란 다름 아닌 고아 돕기였다.
“교회 봉사로 우리 보다 더 바쁘게 사시는 어머니의 평생 소원은 부모 잃은 고아들 뒷받침하는 거예요. 은코가 지금은 미약하지만 앞으로 성장해 수익이 생기면 반드시 엄마의 꿈을 함께 이뤄갈 겁니다”라고 셋은 다짐했다.
은코는 차고에서 비즈니스를 열던 2000년 LA에서 열린 캘리포니아 기프트 쇼에 참가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 제품들이 LA 멜로즈의 술립(Soolip), 샌타모니카의 노트워디(Note Worthy), 베벌리힐스 페이퍼소스(Paper Source)와 뉴욕의 케이츠 페이퍼리(Kate’s Papery) 등 고급 페이퍼리와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북스토어 등 전국의 전문 문구용품점, 북스토어, 플라워샵 등에 납품중이고 이듬해부터는 뉴욕서 열린 전국 문구쇼에도 참가해왔다.
비즈니스 재미가 한참 쏠쏠해지면서 패킹공간과 일손이 바빠지기 시작한 2001년 8월, 지금의 브루어리 아트 콜로니로 장소를 이전, 매년 뉴욕서 열리는 전국 문구쇼와 국제 기프트 페어에 참가해 왔으며 2003년 5월 현재 뉴욕서 열리는 전국 문구쇼에 하얀 바탕의 소형 은코 매장 부스를 차려놓고 전 세계에서 오는 문구업계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또 오는 10월엔 브루어리 아트 콜로니 전체의 연중 오픈 갤러리 행사인 ‘2003 아트 워크’에 맞춰 은코도 일반인에게 오픈할 계획이다.
“은경 언니는 어려서부터 뭐든 묵묵히 양보하는 겸손한 사람이예요. 사실은 UC버클리에서 음악을 전공한 뛰어난 뮤지션인데 절대 나서는 법 없어요. 교회에서 피아노 치는 것을 가장 기뻐하지요. 책임감 강하고 정직해서 언니에게 맡긴 은코의 행정은 걱정 없어요. 또 은희도 UC버클리에서 아트를 전공했어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어서 언니들이 감정에 치우치려 하면 대쪽같은 충고로 바로 잡는 역할을 하지요. 어려서부터 옷 만들기를 좋아해 늘 엄마 곁에서 바느질은 도맡아 하더니만 기특하게도 유능한 패션디자이너가 됐어요. 앞으로 은코가 티셔츠 등 기프트 아이템을 늘릴 계획이라 은희의 활약이 많이 기대되지요.” 서너 달에 한번씩 LA에 와 한 달씩 머문다는 둘째 은주씨가 입을 열자 쏟아지는 위아래 칭찬으로 시간가는 줄 모른다.
결혼과 작품활동 때문에 멀리 떨어져 살지만 서로의 소재파악이 1시간만 안돼도 전화통에 ‘불이 난다’는 이 자매들. 그래서 은코를 알리는 소개장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은코는
세자매의
사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편지쓰고,
전화하고,
찾아가 만납니다.
가운데 자매, 은주의 그림이
서로 사랑을 나누며
삶을 기뻐하고픈 이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인조이!”
<글 김상경 기자·사진 이승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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