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남자 후배와 점심을 먹다가 그의 김치찌개 비법을 들었다. 김치찌개는 보통 돼지고기나 멸치 중 한가지로 국물 맛을 내는데 그의 ‘비법’은 돼지고기, 멸치, 거기에 스팸까지 넣고 야채도 양파, 버섯 등을 다양하게 넣고 끓이는 것이라고 했다.
“주말에 손님들이 10여명 왔는데 마침 아내가 외출 중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해 무얼 만들까 생각해보니 김치찌개가 제일 쉬울 것 같더군요. 인터넷에 들어 가보니 갖가지 요리 비결이 다 나와있어요”
이것저것 섞어 끓인 덕분에 부대찌개 비슷한 맛이 되었지만 손님들 모두 맛있다고 칭찬했으니 ‘성공작’이었다고 그는 자랑을 했다.
배고픈 손님들을 앉혀 두고 인터넷을 뒤져 요리법을 찾는 것도 신세대다웠지만 그보다도 10여명 먹을 음식을, 남자가, 직접 만들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요즘 젊은 남성들은 부엌과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구나 싶어 반가웠다.
20여년전 결혼했을 때 나는 친구들로부터 책상을 결혼 선물로 받았다. 글쓰는 나의 직업을 배려한 선물이었다. 그런데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세간을 정리하던 중 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맞았다. 남편이 책상 정리를 끝냈다 기에 가보니 내 친구들이 선물로 준 책상에 자신의 물건들을 정리하고는 흐뭇해하고 있었다. 책상이나 서재는 일단 남편의 몫이라는 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나 역시 억울하기는 했지만 “내 책상이다”고 고집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방 두칸과 부엌이 있는 집에 살면서 오래지 않아 우리의 구역은 자연스럽게 나누어졌다. 안방은 공동 구역, 서재는 남편의 공간, 부엌은 나의 공간.
책상을 잃어버리는 대신 부엌을 얻는 것은 결혼이 여성에게 주는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이다.
여권운동은 간단히 말하면 부엌에서 여성들을 해방시켜 주자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부엌이 여성 행복의 근원으로 가장 강조되던 때는 1950년대였다. 전쟁을 겪은 후 안정에 대한 희구가 커지면서 교외지역마다 주택가가 들어서고 결혼 붐, 출산 붐이 일었다. 아담한 집에서 집안 예쁘게 꾸미고, 남편 받들고, 아이들 돌보며, 요리하고, 청소하고, 바느질하는 것이 여성의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그 중산층 가정주부들이 알수 없는 병에 걸렸다. 모두들 그렇다고 하는 데 왜 나는 반짝반짝 닦은 마루바닥에서 희열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케이크 굽고, 쿠키 굽고, 쓸고 닦고 그래서 윤기나는 집안, 아이들, 남편이 있는데 왜 가슴 한구석이 허전한 걸까 - 사회가 제시하는 행복의 척도와 자신 사이에서 여성들은 갈등을 하기 시작 했다.
그 여성들이 마침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구나”를 깨닫게 한 책이 바로 ‘여성의 신비’였다. ‘엄마·아내 역할이 여성 행복의 전부’라던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 여권운동의 불을 붙인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가 출판된지 올해로 40년이 되었다. 프리단이 식탁에서 쓰고, 주부들 역시 부엌에서 읽은 책이었다.
그 부엌에서 여성들이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와 각 분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와 정서적 보호장치를 만들어 온 것이 여권운동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여성의 독무대였던 부엌, 혹은 가사노동에 남성들을 참여시켜 가정 내에서 평등한 역할분담을 이루려는 것이 여권운동의 또 다른 축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길중의 하나는 남성들이 거실 혹은 서재에서 부엌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인사회를 보면 불과 몇 미터의 그 길을 가는데 몇 세대가 걸리기도 한다. 1.5세 전문직 여성의 관찰이다.
“우리 집을 보면 남성이 편안한 마음으로 부엌에 들어가는데 3대가 걸리는 것 같아요. 80대인 아버지는 물 한잔도 손수 갖다 드시는 법이 없어요. 어머니가 온갖 시중을 다 드시지요. 50대의 언니 부부를 보면 형부가 간단한 마실 것 정도는 직접 챙기더군요. 미국에서 태어난 20대의 조카는 달라요. 요리든 설거지든 즐거운 마음으로 해요”
부부가 장기적으로 행복하려면 역할도 공간도 평등하게 공유해야 한다고 본다.
남편들이 가끔은 거실에서 보던 TV를 끄고, 서재에서 읽던 책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가는 연습을 했으면 한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온갖 요리법이 다 있다. 가정의 행복은 그런 소박한 배려에서 시작된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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