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밥솥
얼마 전 드디어 전기밥솥을 하나 샀다.
내가 왜 ‘드디어’ 라고 하는지,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전까지 우리 집에서 쓰던 전기보온밥통은 내가 결혼할 때, 그러니까 무려 15년전에 친구가 선물로 사준 5인용 코끼리 밥솥이다. 한 10년은 잘 썼는데 몇년전부터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겉의 광택도 사라진지 오래고 묵은 때가 지워지지 않아 수세미로 닦은 일도 여러번이다. 겉 뿐 아니라 속의 밥통도 코팅이 다 벗겨져 언젠가 속만 새로 사다 바꾼 적도 있다.
남의 집에 갈 때마다 모던한 디자인의 근사한 컴퓨터 밥통이 부엌에 놓여있는 걸 보면 열등감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그러면서 제발 우리 집 밥통이 고장나주기를 학수고대했다. 멀쩡하게 밥이 잘 되는걸 놔두고 새 것을 사는 일은 낭비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그저 미운 밥통을 학대하고 일부러 거칠게 다루면서 고장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마다 낭비하고 절약하는 부분이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는 한 선배는 좋은 집에 살고 돈도 잘 벌면서 먹을 것은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아낀다. 식당에 가도 남는 음식을 모두 싸오기 때문에 냉장고는 늘 여러 일회용 용기들로 가득하고, 먹다 남은 과자가 아무리 눅눅해져도 절대 버리는 법이 없으며, 페이퍼 타월은 작게 잘라서 쓰고쓰고 또 쓴다. 그런 한편 식탁은 값비싼 생화로 장식한 모습을 자주 보게 되니 아리송할 수밖에.
또 다른 친구는 형편이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는데도 신혼초부터 휘슬러 냄비와 노리다케 차이나웨어를 세트로 갖춰놓고 쓰고 있었다. 반면 옷 사입는거, 외식하는 일, 샤핑은 너무도 싫어하여 마지못해 한다니 어떻게 나의 친구가 되었는지 의아한 일이다.
나는 어떤가 하면 해먹는 음식, 사먹는 음식에는 돈을 아끼지 않지만 부엌용품에는 도무지 관심도 없고 무지하게 인색하다. 내가 요리를 잘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우리 집에 예쁜 그릇과 각종 전자제품, 휘슬러 냄비...이런 것들이 즐비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천만에 말씀, 그런건 하나도 없다.
결혼할 때 아무 것도 모르고 사다놓은 싸구려 냄비들과 구닥다리 조리기구들, 선물받은 그릇들이 하나도 변치 않고 그대로 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밥만 잘 해먹으면 됐다 싶지 더 좋은 냄비를 사거나 더 예쁜 그릇에 담아먹고 싶은 욕구를 잘 못 느끼고 있다. 아무튼 다시 밥솥 타령으로 돌아가서, 너무나도 튼튼한 밉생이 밥솥은 고장 낼 생각을 하지 않았고, 더 이상 참을성이 없어진 나는 구실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속의 밥통이 또다시 코팅이 많이 벗겨졌으니 이런 상태로 지은 밥은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며 다시 돈 들여 속만 바꾸는 것보다는 차라리 새로 하나 사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 그 구실이었다.
‘가장 멋진 전기 밥솥을 사리라’ 마음을 다져먹고 의기양양하게 전기제품 스토어에 들어간 나는 그러나 30분후 그 집에서 가장 싼, 보온기능 없이 밥만 해주는 40달러짜리 내셔널 전기밥솥을 하나 사들고 왔다. 이유는 다른 모든 팬시한 밥통들의 기능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맞추는 타이머나 보온기능을 첨단화한 컴퓨터 밥솥들은 보기에는 근사하고 물론 밥도 잘 지어지겠지만 나로서는 매일 쌀 씻어 앉히고 밥만 잘 되어주는 것 외에 더 이상 밥솥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절대로 밥을 보온하지 않는다. 가정주부로서 자랑할 것이 한가지 있다면 매일 남편과 아들에게 막 지은 따끈따끈한 밥을 해준다는 것. 따라서 항상 먹을 양만큼만 짓기 때문에 남는 밥도 거의 없을뿐더러 있다해도 덜어내 냉장고에 넣어두므로 보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식구가 많고 하루에 여러번 식사를 하는 가정이라면 모를까, 하루에 저녁 한끼 밥 해먹는 가정에서는 그때마다 새로 밥을 해먹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밥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닐뿐더러 보온하면 습기가 줄어 맛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40불이면 이렇게 좋은걸. 괜히 알뜰 떠느라 너무 오래 스트레스 받은 것 같다. 다음번 목표는 마이크로웨이브 오븐. 뭘 모르던 신혼시절 왜 그렇게 크고 시꺼먼 오븐을 샀는지, 볼수록 흉물스럽기 짝이 없는데 이것도 고장이 나지 않아 차마 바꾸질 못하고 있다. 얼마 전엔 실내등이 꺼질 듯 말 듯하며 병든 쇠소리를 식식 내기도 해 나를 들뜨게 하더니 다시 건강을 되찾아 씩씩하게 주어진 음식을 돌리고 있다. 이건 무슨 구실을 찾아내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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