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워싱턴 DC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한인 대학생이 헤어진 여자친구를 학교로 찾아가 머리에 총을 쏘고 자신의 머리에도 총격을 가해 자살한 사건이었다.
이들 젊은이는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 3년 정도 교제를 하다가 한달 전쯤 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가해자가 평소 착실하고 신앙심이 깊은 명문 대학생이었고, 양가 가족들도 교우로 잘 아는 사이여서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리라고는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비슷한 사건이 하루 뒤인 지난 26일 워싱턴주 타코마에서 또 발생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경찰국장이 이혼 수속중인 아내를 총으로 쏘고 자살을 했다. 모범 경찰로 인정받아 경찰국장까지 된 인사가 어린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총을 쏘아댔으니 커뮤니티가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LA 한인타운에서도 지난 1월 40대 초반의 남성이 전 애인을 직장으
로 찾아가 총을 쏘고 자살해서 한동안 충격이 컸다.
평소 착실했던 사람들, 평소 학생으로 직업인으로 인정받던 사람들이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 듯, 파멸이 자명한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사건들이 요즘 왠지 더 잦은 것 같다.
폭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 눈먼 괴물처럼 돌변해 날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걸까.
우리 속의 야수, 분노라는 괴물이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감정은 삶을 맛깔스럽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사랑, 미움, 슬픔, 기쁨 등 감정이 있어서 우리의 삶은 호적등본 같은 기록이 아니라 풍성한 이야기 거리가 된다.
분노도 그런 자연스런 감정의 하나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다른 감정들은 가슴이라는 바구니 안에 양순하게 잘 담겨있는 데 반해 분노는 통제력을 상실하면 바구니를 뛰쳐나와 마구 날뛰며 파괴적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들이 겪는 여러 어려움 중의 하나도 분을 참지 못하는 사내아이들의 폭발적 행동이다. 호르몬 변화로 야기된 감정의 격랑을 본인들 스스로도 어찌할 줄 몰라서 터져 나오는 행동이기는 하지만 옆에서 보는 부모에게는 보통 충격이 아니다. 16살 아들을 둔 한 주부가 며칠 전 겪은 ‘가슴 떨리는’ 이야기를 했다.
“내일이 시험인 데 아이가 컴퓨터 앞에서 게임만 하기에 잔소리를 좀 했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아이가 소리를 지르고는 제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서 주먹으로 벽을 치는 겁니다. 너무 놀라서 가슴이 벌렁벌렁 뛰고, 기가 막혀서 눈물이 다 나오더군요”
분노의 회오리가 몰아치면 사람은 옳고 그름의 판단력을 잃고 브레이크 고장난 열차같이 되어버린다. 그 열차가 절벽으로 돌진해 산산조각이 난 사건이 말하자면 앞의 총격사건들이다.
절벽으로 내달리는 극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브레이크 고장이 잦으면 열차에 무리가 가서 수명이 단축된다는 연구보고들이 나와있다.
분노란 원시시대 생존본능의 장치이다. 야수나 적을 만나면 분노를 느껴야 싸워 이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분노가 치솟으면 아드레날린, 코티솔 같은 호르몬이 쏟아져 나와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혈압이 올라가고, 면역기능은 잠정 유보되면서 우리 몸이 비상체제로 돌입한다.
화 잘 내는 사람이 심장질환등 질병과 조기사망 위험이 높은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하버드 공중보건대학 연구에 의하면 화를 잘 내는 남성은 차분한 남성에 비해 심장질환 위험이 3배 이상 높다.
우리 안의 분노라는 괴물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아무 때나 튀어나오게 내버려두는 것도, 무작정 꾹꾹 눌러두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괴물을 달래서 아주 작고 온순하게 길들이는 일이 중요하다.
달라이 라마 같은 분은 타인에 대한 인내심과 관대한 마음을 키움으로써 분노가 기를 펴지 못하게 하라고 가르친다. 심리 전문가들은 심호흡, 명상, 유머를 추천한다. ‘때리는 활동’이 분노 해소에 실질적 효과가 있다는 충고도 있다. 한국에서는 이라크 파병 부대에 분노로 인한 사고 예방을 위한 준비물로 샌드백, 사물놀이 악기 등을 포함 시켰다고 한다.
불경기, 실직, 말썽 부리는 아이들, 실연, 배신… 삶은 밟으면 터지는 분노의 지뢰밭 같다.
지뢰밭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지뢰가 터지지 않게 피해 가는 기술을 익힐 수는 있다. 분노 조절이다.
“내부에 적이 없으면 외부의 적들이 너를 해칠 수 없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나의 내부에서 분노라는 괴물을 잠재우면 외부의 조건들이 나를 심하게 해칠 수는 없을 것이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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