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인터넷 여행사로부터 ‘크루즈 특별세일’을 알리는 이 메일을 받았다. 여행철이 다가오는 때이고, 게다가 지금은 각 학교의 봄방학 시즌인데 웬 세일인가 의아해서 읽어 보았더니 원인은 사스였다.
여행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아시아 지역 크루즈 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그 배들을 미국과 유럽 등지로 돌리느라 세일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벙커 버스터, 집적탄등 가공할 화력의 첨단무기들로 전 세계인의 혼을 빼놓았던 이라크 전쟁이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세계를 공포에 빠트리고 있다.
지난해 11월 중국 광동성에서 첫 환자가 발생한 이후 급성호흡기 증후군(SARS)은 4월16일 현재 전세계 23개국과 홍콩에서 3,293건이 발생해 159명이 사망했다. 실제 감염과 사망도 불 행한 일이지만 더 문제는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음에 따라 확산되는 사회와 경제 전반의 마비현상이다.
기침하고 열나는 감기 비슷한, 일견 간단해 보이는 병이 통제가 안되어서 전 세계가 불안으로 얼어붙는 것을 보면 때로 ‘신의 영역에 대한 침범’으로까지 높이 평가되는 현대의학에도 구멍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SARS로 인한 불안심리, 그에 따른 경제적 타격은 발생건수가 미미한 미국에서도 심각하다. 아시아 지역으로 향하던 모든 발길이 끊기면서 관광업계·항공업계가 최전방에서 피해를 입고 있고, 중국 등지에 생산공장을 두었거나 물품을 수입하는 기업들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이다.
중국 현지를 들먹일 것도 없이 각 도시 차이나타운도 사람들이 접근을 꺼려서 수익이 심한 경우 90%까지 하락했다. 차이나타운이 너무 침체하자 뉴욕에서는 마이클 블름버그 시장이 시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직접 중국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는 솔선수범을 보였다.
SARS 같은 괴질은 왜 갑자기 생기는 것일까. LA의 한 의사는 새삼스런 일이 아니라고 했다.
“20여년 개업하던 중 이름도 없던 새로운 질병이 등장한 것이 너덧번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에이즈이고 가장 최근 것이 지금의 SARS이지요. 앞으로도 듣도 보도 못한 질병들은 계속 나올 겁니다”
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이러스에 관한 한 아직 별 진전이 없는 것이 의학계의 현실이라고 그는 말했다. 가장 흔한 병, 감기를 아직도 치료하지 못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바이러스의 크기와 상관이 있다.
“박테리아가 큰산이라면 바이러스는 작은 집 정도입니다. 전자현미경으로 봐야 겨우 보이지요. 박테리아는 커서 항생제로 직접 죽이면 간단히 해결이 됩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활동을 안 할 때면 세포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걸 찾아내기도 힘들지만 찾는다 해도 죽일 수가 없습니다. 바이러스를 죽이면 세포까지 같이 죽게 되니까요. 병균 죽이려고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아직까지는 예방주사로 면역력을 길러서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 왔을 때 활동하지 못하고 동면상태로 있도록 억압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는 이상한 연쇄 살인사건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람들이 연쇄적으로 살해되는 데 범행현장에는 범인이 강제로 들어간 흔적도, 피해자가 저항한 흔적도, 목격자도 없다. 지문은 물론, 종이조각 하나도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남기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지는 범인을 한 똑똑하고 자신만만한 형사가 추적한다.
소설 제목이 암시하듯 범인은 사람이 아니라 개미떼였다. 신체 건장한 남성을 저항 한번 못하게 제압하는 상대라면 ‘분명 더 크고 더 힘센 존재일 것’이라는 상식적 가정에서 출발한 수사는 번번이 벽에 부딪친다.
사람이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는 미물인 개미가 완전범죄의 주인공으로 판명되기까지, 소설이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은 사물을 다른 관점에서 보는 훈련이다.
현대 문명은 트로피 문명이다. 눈에 보이는 것, 많은 것, 큰 것에 우리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다. 성취와 업적에 시각이 고정되다 보니 잊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약함, 우리의 부족함이 그 하나이다. 작은 바이러스 하나로 세계가 흔들리는 이번 SARS 파동을 계기로 부활의 계절에 우리의 약함을 되돌아 보았으면 한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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