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지난 주말에 집어넣었던 오퍼가 안됐다는 연락이 왔다. 요즘 괜찮은 매물이 다 그렇듯이 오퍼가 복수로 몰렸는데 내 손님의 오퍼가 불합격된 이유는 ‘더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란다. 아니, 더 좋은 조건이라서 떨어지다니? 그 집은 초등학교에서 한 골목 떨어진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다. 주인은 다운타운에서 사업을 하시는 분. 십여년을 그 집에서 살면서 자녀들을 길렀다.
“우리가 여기 사는 동안 제일 좋았던 건, 부모가 멀리 일하러 가고 없을 때에도 애들이 학교를 걸어다닐 수 있고 학교 마당이 집 앞 놀이터처럼 친근해서 학교가 애들 생활의 중심이었던 거였는데 ‘덜 좋은 조건’의 바이어가 어린애들 데리고 집 보러 왔을 때 옛날 우리 생각이 났거든요. 저 가족이 이 집을 사면 참 행복하게 엔조이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내 이익 때문에 더 나은 쪽을 택한다는 게 마음에 자꾸 걸려서…”
일요일 내내 기도를 하면서 내린 결정이니 양해해 달라고 유리한 쪽으로 가자는 에이전트를 얼굴까지 벌개져 가며 설득하셨다는 것이다. 세상에 뭐 이렇게 ‘귀한 바보’가 있나 싶어서 내 손님의 실망이며 내 본분도 잠깐 잊고 감격했다.
십사년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내 손님이 덕을 본 경우였는데 액수 차이가 퍽 컸었건만 사고로 휠체어를 타고 생활해야 하는 바이어에게 문턱이며 계단이 전혀 없는 집을 지은 주인이 손을 들어주었었다. 더 멋진 일은 3년 후 보험금을 배상 받은 바이어가 옛 주인을 수소문 끝에 찾아내어 그 옛날의 차액을 갚으려 했지만 부동산 경기가 너무 나빠져 집 값이 떨어졌다고 극구 사양하며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해주라고 했던 또 다른 ‘바보’들의 이야기. 아무리 적어도 십만달러는 넘는 돈이 왔다갔다해야 하는 일을 하다보니 돈 앞에서 사람들이 엮어내는 드라마는 거래마다 등장인물마다 매번 새롭다.
‘세리토스의 똑똑한 할머니’로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 하나. 세리토스의 아들집에 사시던 할머니에겐 라카냐다에 사는 딸이 있었다. 낼모레쯤 딸네 집에 가야지 싶으면 할머니는 세리토스 지역의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해서 ‘라카냐다 쪽에 볼 집 몇개 골라 놓고 데리러 와라’ 하시곤 몇 집을 구경한다. ‘내 일간 연락할 테니 볼일 좀 보고 가게 어디어디에 내려 놓아다오’ 하곤 딸집에 가시고 세리토스로 돌아갈 때를 맞춰선 라카냐다 에이전트가 동원이 된다. 이 회사 저 회사 양쪽 동네 에이전트들 여남은 명이 모두 무료 셔틀 운전사 노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집 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나.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스토리도 있다. 빗길 운전은 아무래도 남자가 낫다 싶어서였는지 어쨌든 비오는 날이면 우울증이 더 깊어지는 이 긴 머리의 40대 귀부인은 꼭 남자 에이전트들을 불러내어 집 구경인지 비 구경인지를 겨울 내내 다녔다. 기품 있게 생긴 미모의 여인이 푹신한 차 뒷자리에 파묻혀 조용히 하는 한마디는 “클래식 음악 좀 틀어 주실래요?” LA에선 예약 없이 집 보기가 힘들지만 교외로 나가면 에이전트 전용의 매스터 키(key) 시스템이 있으니까 비오는 날마다 전화를 받고 스튜디오시티에서부터 엔시노로, 우드랜드힐스로 101번 프리웨이를 조심조심 운전하던 남자 에이전트들이 이 여인이 ‘약간 맛이 간’ 줄 알게 됐던 건 겨울비도 다 물러간 어느 봄날 저녁 동료끼리 소주잔을 나누다가 였다고.
이 정도의 헛물켜기야 허허 웃고 말면 그만이지만 집 보러 갔다가 에이전트 몰래 뒷문을 슬쩍 열어둔 채로 나온 뒤 다시 돌아가 집털이를 해대던 청년이나 ‘600만불의 사나이’는 경찰의 수사협조 공문까지 각 회사에 돌게 하기도 했다.
손님별곡
자동차 바디샵에서도 허드렛일과 야간 경비를 해주는 대가로 허름한 소파가 유일한 거처였던 ‘600만불‘씨는 정비소가 문닫은 시간 이후면 손님이 아직 안 찾아간 고급 차들을 번갈아 끌고 다니며 상업용 빌딩을 보러 다녔는데 허우대도 멀끔하고 에이전트를 옆에 앉혀둔 채 여기 저기 비즈니스 전화를 하는 내용이 어찌도 그럴싸하던지 ‘급히, 잠깐만 돌려야 할 잔돈푼’ 5천불, 만불을 꾸어주고도 ‘회장님께’ 째째하게 몇천불 갚으란 말을 감히 못 꺼내게 했던 사나이였다.
하지만 ‘정초 새벽의 삐삐 아저씨’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1월 초하루 첫새벽에 비퍼를 쳐서 ‘에헴, 에헴’ 헛기침을 하며 “내가 오늘 집을 좀 볼까 하는데…” 하던 지긋한 나이의 음성. 어느 셀러가 신년 벽두에 집을 보이겠으며 정월 초하룻날 집 보이러 나올 셀러 에이전트가 어디 있겠느냐고 정중하게 설명은 했겠지만 어조야 아무리 공손하게 꾸밀 수 있었다 해도 그 말을 할 때의 내 마음이 쌀쌀맞고 차갑게 그를 밀쳐내던 것을 오랫동안 후회하였다.
일년 내내 일하다가 그 날 하루밖엔 쉴 수가 없었던 진짜 바이어는 아니었을까? 혹은 집을 꼭 살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명절은 왔건만 함께 떡국 나눌 아무도 없이 그저 사람 사는 냄새와 온기가 새삼 더 그리워 구조요청 신호를 보내듯 비퍼를 쳐본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 후로 연초가 되면 그 양반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번만 더 전화를 해 온다면 잘 해 드릴텐데’하는 마음과, 이젠 그런 날 전화할 형편에서 벗어났기를 바라는 마음이 엇갈리며 생각이 짧던 젊은 날을 부끄러워한다.
금년 한해는 또 어떤 손님들을 만나게 될까. 그들을 만나는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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