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중에서)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따라 외울 수 있는 친근한 시이다. 봄에 그렇게 울던 소쩍새, 여름에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던 천둥 - 그 오랜 풍상을 이겨내고 찬 서리 내리는 가을에 피어난 국화꽃을 시인은 ‘내 누님’에 비유하였다. 젊은 날의 격정과 고통, 좌절과 시련을 두루 다 겪어낸 성숙한 여인의 서늘하고 초연한 자태, 인고(忍苦)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으로 대개 읽혀진다.
젊은 시절 한바탕의 ‘외유’를 끝내고 인생의 가을을 맞으며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존재를 시인은 ‘누님’ 즉 여성으로 그렸다. 그런데 찬 서리 내리는 가을에 해당하는 50대 중반, ‘돌아와’‘거울’ 앞에 서는 존재가 사실은 남성이라는 연구보고들이 나오고 있다. 관심이 온통 집 ‘밖’의 직업적 성취에 맞춰졌던 남성들이 이 나이가 되면 집‘안’으로 돌아와 가족관계에 눈을 돌리고, 거울 앞에 서듯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이다.
밸런타인스 데이가 있는 2월을 맞아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부부 사이의 육체적·정신적 사랑이 결혼생활의 행복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지를 조사한 특집을 실었다. 결혼한 18세 이상의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 결과를 5개 연령층으로 나누어 나이별 특징을 분석했다. 부부가 평생을 같이 행복하게 살려면 섹스와 로맨스가 어느 나이에서건 중요하다는 것이 전반적인 결론으로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다.
한가지 재미있는 발견은 나이에 따라 남편과 아내의 관심이 어긋나는 시기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시기가 바로 50대 중반부터 60대 중반, 인생의 가을이다.
이 나이에 남성들은 대단히 감성적이 된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에 몹시 행복감을 느끼고, 아내와 단둘이 오붓한 시간을 갖고 싶은 마음이 일생 중 가장 강한 때로 나타났다. 사회적으로는 은퇴가 눈앞에 닥치고, 육체적으로는 갱년기를 맞으면서 “내가 평생 사는 것이 아니로구나”라는 깨달음과 상관이 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결국 아내로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아내들에게 있어서는 이 나이가 남편과 단둘이 있고 싶은 마음이 일생 중 가장 낮은 때이다. 자녀들은 독립하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돼 가장 홀가분한 이 시기에 여성들은 집 ‘안’보다는 ‘밖’으로 나가 뭔가 자신만의 활동을 하고 싶어한다. 전업주부건 일을 하던 주부건 평생을 가족 뒷바라지에 바쳤으니 “더 늦기 전에 나도 내 인생을 좀 살아보자”는 욕구이다.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고, 아내는 반대로 밖으로 나가는 현상은 한인들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50대 주부들 사이에는 “반찬 맛있게 하지 말라”는 농담이 있다고 한다. “맛있는 것 해주면 남편이 점심까지 집에 와서 먹으려 든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 나이의 남성들에게 가장 큰 착각은 자신이 옆에만 있어 주어도 아내가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내는 자녀들에 매이고, 남편은 일에 매여서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던 30대 40대 때의 이야기이다. 남편에게 의존적이던 아내는 점점 홀로 서기를 추구하고 남편은 점점 아내에게 의존적이 되는 것이 이 나이이다. 50대 후반 주부들이 모이면 흔히 하는 말들.
“나이 드니 남편이 의존심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집안에서도 잠시만 안보이면 (나를) 찾고, TV를 봐도 꼭 옆에 앉아서 보자고 해요”“지난 연말에는 여학교 동창회에도 못 갔어요. 남편을 집에 두고 나갈 수가 있어야지요. 저녁식사 차려놓고 나가려니 꼭 어린아이를 혼자 두고 나가는 것같아서요”“남편의 코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잘수가 없어요. 옆방에 좀 가 있다 오고 싶어도 그러지를 못해요. (남편이) 내가 없으면 잠을 못 잔다는 거예요”
남성과 여성이 젊었을 때와는 정반대의 입장이 되는 이런 현상은 대개 호르몬 변화 때문으로 설명이 된다. 폐경기·갱년기를 맞아 각 성징을 나타내는 호르몬이 줄어들면서 여성에게서는 상대적으로 남성 호르몬이 늘어나고, 남성에게는 여성 호르몬이 늘어난 결과라는 것이다.
남편들은 젊은 날의 자신을 생각한다면 ‘밖’으로 향하는 아내가 이해될 것이다. 아내들 역시 젊은 날을 생각하며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남편을 따뜻이 맞아 주어야 하겠다. 행복한 결혼의 최대의 조건은 사려 깊은 타협이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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