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부터 중학교 때까지 한문을 배우다가 문교부의 정책이 바뀌는 바람에 고등학교 때 한문교육이 없어졌다. 논란이 있자 우리가 졸업을 한 뒤에는 다시 한문교육이 부활되었다. 문교부의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우리 때의 몇 년간은, 나처럼 한자에 무지한 사람을 양산해 내었다. 아는 한자라고는 선생, 학교, 대한민국...에 이름자 정도의 기초 한자일 뿐이어서 한자가 가득 써진 서류나 신문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경끼를 일으킨다.
반대로 한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시는 분들을 보면 부럽기도 존경스럽기도 하다.
같은 동네에 새로 이사온 오빠가 있었다. 명문 K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으로 마름모꼴의 명찰에는 한자로 이름이 적혀있었다. 마지막 이름자가 ‘泉’ 자였다. 나는 그 글자가 ‘샘’자인 줄 알았다. 우리부엌에서 늘 보아온 샘표 간장에 크게 적혀있던 글자가 ‘泉’ 자였기에 너무도 자신 있게 확신하였다.
나보다 두 살 위인 그 오빠는 고 3이었는데 오빠의 시간에 맞추어 이른 등교를 하느라 버스정류장으로 일찍 달려나가곤 했다. 매일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치면서 익숙해진 몇달 후 대학에 진학하면서 쓰던 참고서를 제 동생이 아닌 내게 물려주었다. 오빠의 이름이 적힌 참고서를 받고 얼마나 설레었는지...
그 오빠의 이름을 수없이 써 보기도하고 속으로 불러보기도 했었다.
얼마 후 집에 놀러온 사촌으로부터 그 글자가 샘 ‘천’ 이라는 글자라는 걸 듣고 죽고만 싶었다. 흠모하는 이의 이름자도 제대로 모르고 좋아했다니. 이름을 부르는 사이는 아니었어도 혹시나 그 오빠 앞에서 실수라도 했을까 싶기도 하고, 나의 무식함에 내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야말로 그 오빠 앞에서 잠수해 버렸다. 연락두절의 영문을 몰랐을 그 오빠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다.
대학 졸업 후엔 준비도 없이 신문기자 시험을 보러갔다. 졸업하면서 받은 교사자격증으로 선생을 하는 것 보단 여기자가 되는 것이 훨씬 멋있을 것 같았다. 공부도 안하고 연합통신의 기자 시험을 보러갔는데 고사성어가 출제되었다.
‘조령모개’의 뜻을 묻는 문제… 후에 알아보니 그 당시의 신문에 자주 회자되었던 고사성어였다고 한다. 조령모개(朝令暮改)...’아침에 내린 명령을 저녁에 고친다’는 뜻으로 정부의 잦은 정책 변화를 비판할 때 많이 쓰였다고 한다. 한글로만 덜렁 써놓고 물으니, 조변석개(朝變夕改)나 조석지변(朝夕之變)은 들어보았어도 내겐 생소했던 조령모개… 이 단어를 보고 갑자기 왜 보릿고개 생각이 났었는지.
‘먹고살기 힘든 춘궁기를 말함’ 이렇게 답을 썼으니 붙을 리 만무했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들아이에게 고급의 한국말을 가르치고 싶었다. 주말 한글학교도 보내고방학마다 한국을 보내고 했더니, 억양도 발음도 어색하지 않고 한국에서 자란 아이 같다. 거기다가 한문을 배워주면 뜻을 잘 알고 한국말을 더 잘할 것 같아 중학교 때는 천자문을 익히게 했다.
다행히 중고생용 천자문이라는 책을 이곳 서점에서 구 할 수 있었다.
고 3인 아이의 이번 방학은 생각보다 시간이 많았다. 학교에 지원을 해 놓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니 바쁠 일이 없었다. 시간이 널널 하니 제 아빠가 고사성어 책을 공부하라며 아침마다 숙제를 주고 나간다. 책에는 가나다순으로 제법 많은 고사성어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흔히 쓰이는 단어를 골라주었다. 감언이설, 결자해지, 내유외강, 녹의홍상, 대기만성...등의 쉬운 것들이다. 때마침 한국에서 오신 외할머니의 응원을 힘입어 잘 공부하고 있다.
정초부터 회사에 복잡한 일이 생겨 “아이구 이러다… 내 명대로 못살겠다” 엄살을 떨었더니 아들이 아는 척을 한다. “엄마, 가인박명(佳人薄命)인데 엄마는 일찍 안 죽어요. 염려 마세요~” 아들의 훌륭한? 응용력 때문에 웃었다.
이곳에 오래 살다보니 영어도 유창하지 못하면서 한국말도 점점 잊어버리고, 더구나 한자말은 더 어렵게 생각된다. 영어도 못하고 한국말도 못하는 얼치기가 되어가고 있다.
인터넷의 독자 한 분이 요즈음 한국신문에 잘 나온다는 ‘줄탁동기’라는 유식한 단어를 알려주셨다. 달걀이 부화 할 때, 때가 되었다는 표시로 병아리가 안에서 톡톡 소리를 내는 것을 ‘줄’ 이라고 하고 그 소리를 듣고 동시에 어미가 밖의 껍질을 쪼아주는 것을 ‘탁’. 그러면 그 안에서 마침내 생명체가 나오는 절묘한 타이밍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국민과 새 정부가 하나가 되자는 뜻을 이 한문에 비유하여 말한다는 것이다. 한자는 참으로 멋이 있다. 글자 속에 은근한 의미가 들어있으니 말이다. 뒤늦게 아들의 어깨너머로 고사성어를 배우는 요즈음이다.
이정아<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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