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도 아닌데, 엄마가 해준 음식을 한번도 못 먹어보고 자란 사람이 있을까? 내가 바로 그런 사람, 알고 보면 나도 참 불쌍한 사람이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는 평생 일을 하시느라 주부로서 가정일을 전혀 돌보지 못하셨다. 일제시대에 드물게 대학공부를 하신 어머니는 대한민국 최초의 여의사중 한 분이셨다.
여학생을 받아주는 의대가 없던 시절이라 처음엔 이화여전 가정과에 들어갔는데 몇년후 경성여의전이 생기면서 다시 시험쳐 의대에 들어갔다고 하셨다.
“60명 모집에 26등으로 들어갔다”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쟁쟁하다.(경성여의전은 훗날 수도여의전으로, 다시 우석의대로 바뀌었다가 고려대 의과대학으로 합병됐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경성여의전 1회 졸업생이셨으며, 몇 안되는 최초의 여의사였고, 그들중 내가 알기로 가장 늦게까지 개업의로 활동하신 분이다.
종로 2가 YMCA 건너편, 태극당과 고려당 사이의 빌딩 3층에 근 40년 간판을 달았던 ‘유호숙 이비인후과’를, 내 학창시절의 많은 추억이 묻어있는 그 거리의 풍경을 나는 잊지 못한다. 의사가 많지 않았고 더구나 이비인후과는 거의 없던 시절이라 어머니의 병원은 항상 환자들로 넘쳐났다.
그 옛날 한국에서 투기하지 않고 자신의 노동만으로 어머니같이 돈을 많이 번 여성은 아마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불행하게도 그 많은 돈을 모두 아버지가 사업하신다고 펑펑 날리는 바람에 우리 일곱형제는 늘 먹을 것을 놓고 싸우며 자라야 했다.
어머니는 매일 저녁 늦게 파김치가 된 모습으로 들어오셔서 앉자마자 식사를 하셨다. 그럴 때면 어린 나와 동생은 조르르 달려가 식사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는데 반찬이 없어도 어찌나 맛있게 드시는지, 철없는 우리는 저녁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옆에서 입맛을 다시다가 또다시 숟가락을 집어들게 마련이었다. 그러면 언니들이 질색을 하며 말렸지만 어머니는 ‘놔둬라’ 하시면서 음식을 우리 앞으로 밀어놓곤 하셨다.
어머니는 단 한번도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하신 적이 없지만 사시사철 주방에서 해야할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빠삭한 이론가셨다. 메주는 어떻게 띄우고 된장과 간장은 어떻게 만들며 김장철이 되면 무엇을 들여놓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모든걸 정식으로 알고 계셨다. 좋은 가문에서 외딸로 자라면서 친정어머니로부터 배운 때문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정작 자식들에겐 밥 한끼를 지어주시지 못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장면은 어느 날 식모가 나가버리자 언니들이 부엌에 들어가 상을 차리는데 어머니가 돕겠다고 나오신 일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은 어머니는 김을 굽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재어놓은 김을 가져간 어머니가 잠시후 모기만한 소리로 “숙이야” 하셨다.
돌아보니 “얘, 이게 왜 이러냐” 하고 물으시는데 손가락 사이에 쪼그라든 작은 김조각이 보였다. 석쇠에 펴서 굽는 것을 해본 적 없는 어머니가 불 위로 김을 들이대자 호로록 타버린 것이었다. 이론은 빠삭하되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어머니의 그 낭패스럽고, 창피하고, 미안해하시던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플 때 어머니가 해주시던 음식 생각이 간절하다고 말한다. 몇 해전 나의 아들이 감기몸살로 아프던 날 “엄마, 전에 나 아플 때 끓여준 매운 국 있지? 그거 먹고싶어?” 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육개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 이 아이는 적어도 나를 기억할 때 내가 해준 음식도 그리워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왜 그리도 감격스럽던지...
나는 아플 때 어머니가 소독약 냄새나던 손으로 내 이마를 짚어보시고 곧이어 주사를 놔주시던 생각이 난다. 75세가 넘도록 평생 흰 가운 입고 환자 보시던 자그마한 어머니의 모습, 어머니와 늘 함께 있던 크레졸 냄새가 지금도 코끝을 감돌며 아스라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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