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딸·딸·딸·딸·딸·딸…아들’
며칠전 한국신문에 실린 한 기사의 제목이다. 광주시가 출산장려책으로 시행한 다산왕(多産王) 공모 결과를 보도한 내용이다.
인구팽창을 고민하던 한국이 불과 30~40년만에 정반대의 고민을 하고 있다. 여성들의 활동무대가 집안에서 사회전반으로 확대되면서 출산기피 풍조가 만연한 결과이다. 가임여성 1인당 평균 자녀수가 1.3명이라니 이대로 가다가는 인구감소의 부작용이 초래되겠다며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다산왕 공모는 출산기피 현상에 맞서 여성들의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광주시가 짜낸 묘안이다. 그런데 선발된 여성들의 출산 이력이 하나같이 ‘딸·딸·딸·딸 … 아들’이다. 올해의 다산왕이 된 41세의 주부는 딸 7명을 낳은 후 막내로 아들을 낳았고, 연소자 우선 원칙에 따라 2등으로 밀려난 44세의 주부 역시 비슷한 경로로 1남7녀를 두었다. 3등은 딸 6명을 낳은 후 1년전 마침내 아들을 낳은 33세의 주부가 차지했다.
자녀 많은 다복한 가정을 원했다기 보다는 단지 아들 하나를 얻기 위해 젊은 날의 노른자위 10여년간 임신·출산, 임신·출산…을 반복한 이들 여성을 보면 한 사회의 의식이 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가 있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등 산아제한 캠페인은 자녀의 수를 줄이는 외형적 성공은 거두었지만, 남아선호 의식을 뿌리 뽑는 것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
‘딸·딸·딸·딸·딸…’이 전근대적 남아선호라면 초등학교 교실에 남자아이들만 그득한 기현상은 태아 성감별이라는 현대과학에 의존한, 더 잔인한 남아선호이다. 여아들은 언제까지 ‘미운 오리새끼’ 취급 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지난 연말 LA 한국문화원에서는 노부부의 회혼례가 있었다. 김학용(83)·공님(77)씨 부부가 결혼 60주년을 맞아 전통 혼례복을 차려 입고 자손들, 친지들 앞에서 성대한 혼례식을 가졌다. 연지곤지 화장에 족두리를 쓰고 활짝 웃는 할머니, 그 옆에서 상기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언뜻 떠오른 생각은 “딸 많은 집이 아닐까?”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씨 부부는 1남5녀를 두고 있었다. ‘딸, 아들, 딸·딸·딸·딸’의 김공님 할머니는 결혼생활 60년동안 가장 힘들었던 일로 ‘줄줄이 딸을 낳은 것’을 꼽았다. 장녀인 유수경씨는 “동생들을 낳을 때마다 어머니가 우시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어머니는 늘 할머니께 미안해 하셨어요. 막내 여동생이 태어난 후 어느날 학교에 갔다오니 아기가 안보이더군요. 또 딸을 낳아 아버지 볼 면목이 없다며 아기를 외가로 보내신 것이었어요. 막내는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외가에서 자랐지요”
‘딸·딸·딸…’의 죄책감과 아들하나로는 기댈 언덕이 마땅치 않은 허전함이 수십년 가슴을 떠나지 않던 김 할머니는 이제 “딸들 덕분에 미국에 와서 호강하며 산다”고 흐뭇해 한다.
노인 아파트에서 유난히 방문객이 많은 집, 버스를 전세내야 할만큼 대가족이 같이 휴가를 가는 우애 깊은 집의 특징은 대개 딸이 많다는 것이다. 격식과 예의의 수준을 넘어서 가족들의 열의와 단합이 있어야 가능한 특별한 가족행사들을 보면 십중팔구는 딸이 많은 집, 혹은 딸이 맏이여서 형제들 사이에 주도권을 가진 집이다.
“아들은 장가들기 전까지 아들이고, 딸은 평생 딸이다”는 속담, “딸 셋인 집은 웃음꽃, 아들 셋인 집은 찬 구들장”이라는 류의 말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주위에서 흔히 접하는 현상이다.
딸 많은 부모의 노후가 대개 안락한 것은 여성들의 타고난 자상함과 우선 상관이 있다. 아울러 가부장제에 바탕한 관계의 성격과 상관이 있다고 본다. 아들을 축으로 형성되는 관계들은 책임과 의무의 관계인데 반해 딸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관계들은 부담이 없는 민주적 관계이다.
잘 하든 못하든 아들부부는 부모를 보살필 의무가 있고, 남자 형제간에는 위계질서가 분명하며, 그 아내들인 동서들도 상명하복의 구조이다. 반면 딸 부부와 부모사이, 자매들 사이, 그 남편들 사이는 의무가 없는 자유로운 관계들이다. 부담이 없으니 자주 모이고, 자주 모이니 화기애애한 것이다.
아직도 딸에 대해 아쉬움이 있는가. 지금 우리 부모에게 누가 가장 자주 전화하고, 찾아가고, 냉장고에 먹을 것을 채워넣으며, 다달이 용돈을 챙기는가를 생각해보면 해답이 있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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