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앞에서 모처럼 단정하게 옷깃을 여미는 연초, 두가지 시간적 가정이 눈길을 끈다. “만약 내 삶이 3일밖에 남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과 “5년 후의 모습을 생각한다면”이라는 가정이다.
‘3일밖에…’는 며칠전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설된 유언장 웹사이트(yoounjang.com)의 주제이다. 언젠가 닥칠 생의 끝을 미리 앞당겨 생각하면서 살아온 생애를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적어놓고, 재산분배도 해서 후회가 없도록 하라는 취지이다. 굳이 유언장까지 쓰지는 않더라도 ‘마지막 3일’을 가정해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마지막 3일’은 결국 ‘현재’를 가다듬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5년 후’는 노무현 정권 출범을 앞두고 요즘 신문지상에 자주 등장하는 고언이다. 지금 들떠서 샴페인만 터트릴 것이 아니라 ‘5년 뒤 웃는 대통령’이 되고, “2008년 2월에 성공적 임기말을 자축할 수 있도록” 바른 정치를 해달라는 부탁들이다.
대통령 임기가 5년 단임제로 바뀐 후 감격과 기대가 실망과 배신감으로 역전되는 경험을 5년 단위로 반복해온 국민들로서 이런 부탁, 이런 요구는 당연하다. 영화를 보아도 마지막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 법인데 한국민들에게는 해피 엔딩의 ‘정치 영화’가 없다. 주인공들이 개선장군처럼 등장했다가 권력이라는 아편에 중독된 후 패잔병처럼 물러나는 스토리에 너무 익숙해 있다.
“5년 후를 미리 생각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한화갑 민주당 대표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한 후회의 말이다. DJ를 정점으로 온갖 핍박을 감수하며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던 동교동계가 다른 사람도 아닌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해체 지시를 받고, 한대표 자신은 후배들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는 지금의 상황을 5년전 그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는 5년후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될지 생각 못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5년전과는 천양지차이다. 5년후 모습을 생각하고 일을 했더라면 실패한 모습이 안나오도록 했을 거다”- 어디서부터 방향이 틀어진 것일까.
젊은 시절 공군장교로 복무했던 분이 “조종사 친구들이 많아서 조종실 구경을 자주 한다”고 자랑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요즘 항공기들은 컴퓨터로 작동되기 때문에 계기만 맞춰 놓으면 조종사 친구와 한담을 나누며 편안히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겠지만, 비행방향의 각도에 아주 작은 오차만 있어도 LA로 날아가야 할 비행기가 칠레에 도착하고 만다고 한다. 처음에는 눈금 하나의 차이가 먼 거리를 지나는 동안 엄청난 편차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처음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에 도착해 당황하는 것은 삶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바이기도 하다. 바쁘게 허둥지둥 살다가 문득 살펴보니 사막 한가운데, 혹은 낭떠러지 바로 앞에 서있는 경우들이 있다.
불교는 우리가 삶의 바른 방향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 즉 마음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으로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꼽는다. 마음의 세 가지 독, 탐(貪)과 진(瞋)과 치(痴)이다. ‘5년후에 도착할 곳’의 방향을 확실하게 잡지 않으면 ‘탐진치’의 안개가 시야를 가려서 전혀 낯선 지점에 떨어질 수가 있다.
‘5년후…’가 지향점에 대한 인식이라면 ‘3일’은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점검이다. 내게 단 3일의 삶이 허용된다면 그 마지막 시간에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이 생에서 하지 못하고 그냥 떠나면 후회할 것은 무엇인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는 비슷할 것 같다 - 제일 소중한 것에 제일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 어느 책에 인용된 글이다.
“살날이 많지 않다면 나는 말을 적게 하고 더 많이 들을 것이다. 카펫이 더러워지고 소파가 닳더라도 더 많은 친구들을 초대할 것이다. 장미가 새겨진 초가 창고 안에서 녹기 전에 불을 켜리라.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더 많이 하리라”
하찮은 카펫 때문에 사랑하는 친구들을 멀리하고, 창고에 초를 잔뜩 쌓아두기 위해 돈을 버느라 초 한번 켜보지 못하며, 가족들과 훗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집에도 못가고 일만 하는, 주객이 전도된 삶 역시 ‘탐진치’의 소치라고 할 수 있다.
인생에는 리허설이 없다. 인생이라는 항공기의 컴퓨터에 지향점을 분명하게 입력하고, 시야를 맑게 닦아야 하겠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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