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서 한적하던 집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대학이나 직장 따라 타지역에 살던 자녀들이 돌아오고, 결혼한 자녀들이 배우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하고, 한국에 사는 형제 자매가 따뜻한 캘리포니아의 겨울 구경을 오기도 하고 …
“빈집같이 조용하던 집에서 밤늦도록 웃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음식냄새가 하루종일 집안에 가득하니 사람 사는 집같다”고 주부들은 즐거워한다. 연말은 가족들이 얼굴을 마주 들여다보며, 뿌리깊은 애정을 확인하고, 그래서 모두 재충전되는 가족 축제의 계절이다.
그런데 이 축제의 계절이 연중 가장 괴로운 가족들이 없지 않다. 가족간 감정의 앙금이 깊은 경우들이다. 얼마전 모임에서 한 친지가 말했다.
“부부간 불화는 나이 들었을 때 더 문제이더군요. 노부부가 서로 원수처럼 지내면 본인들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삼남매를 둔 60대후반 노부부의 이야기였다. 젊어서 바람둥이로 속을 썩였던 남편을 절대 용서할 수가 없어서 할머니가 남편과의 대면을 피한지 오래 되었다는 것이다. 손자들을 돌봐줄 겸 몇 달씩 자녀들의 집을 차례로 돌며 지내왔는데, 남편이 맏이 집에 있으면 아내는 둘째네 집에 머무는 식이어서 부부가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온 식구가 모이는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 설날등 연말연시에는 노부부가 어쩔수 없이 자리를 같이 하게 되고, 그들의 노골적 적대감은 자녀들과 손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제 다 지난 일, 그렇게 용서가 안될까.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왜 분노와 증오감으로 보내야 할까”- 자녀들은 안타깝다고 했다.
“용서만 하면 다 해결될 걸…”이라는, 말은 쉽지만 실천이 어려운 주제가 사실은 21세기 의학계의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몸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니어서 많은 경우 환자의 마음을 치료하지 않고는 완치가 어렵다는 사실을 의학계가 뒤늦게 깨달은 결과이다. 2주전 하버드 의과대학의 심신의학연구소가 개최한 ‘용서’ 웍샵에는 의료전문가들과 병원 원목등이 참석, 용서가 질병치료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지를 진지하게 분석하고, 용서 훈련법을 배웠다.
90년대부터 진행되어온 ‘용서’연구 결과를 보면 증오와 원한에 사무쳐 있던 사람이 그 대상을 용서하고 나면 불안과 우울증이 해소되고 자긍심이 높아지면서 삶에 대한 희망과 건강을 회복한다. 바윗덩어리처럼 가슴을 누르던 증오감이 사라지면서 날아갈 듯한 해방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도 용서하고 난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으로 드러났다.
용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까.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라고 50대의 한 남성은 말했다. 수년전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을 취재하러 가서 만난 분인데 그는 부모에 대한 해묵은 증오가 있었다. 성장기때 아버지의 심한 매질과 어머니의 냉대가 가슴깊이 상처로 남아서 성인이 되고도 풀리지 않았다.
“내가 꿈꾸던 것들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별볼일 없이 살고 있는 것이 모두 부모 탓이라고 생각했어요. 부모가 내 날개를 꺾어 버렸다고 원망했지요”
그런데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 자녀양육의 어려움을 겪어 보고, ‘아버지 모임’에 나가 과거의 상처들을 털어놓다 보니 “아버지가 이해가 되더라”고 그는 말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앞뒤가 꽉 막힌 현실에 좌절한 가장이 그 울분을 만만한 자식에게 터트린 것이었다.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그런 가장의 심정을 이해는 할수 있다고 했다.
“부모님을 용서하는 데 근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나니 부모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아내와 자식과의 관계까지 모두 좋아졌어요. 마음이 편해지면서 행복이 뭔지를 알겠더군요. 목표 달성이 아니라 이런게 인생을 사는 진짜 재미로구나 하는 걸 깨달았습니다”
기독교나 불교등 종교는 사람 마음의 본성을 지극히 순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의 형상’혹은 불교의 ‘불성’은 한점의 티가 없는 맑고 투명한 빛과 같은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미움, 분노, 탐욕등 부정적 요소들이 끼여들면서 맑은 물과 같아야 할 우리의 마음은 고통의 흙탕물로 변해 버렸다.
며칠 안남은 연말에 마음을 들여다보자. 걸러내야 할 것들, 털어 버려야 할 것들이 많지는 않은가. 마음 속 앙금들을 대청소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았으면 한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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