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날은 괜히 기쁘고 즐거워 종일 웃고 다녔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이 그렇게 신나는 일인줄 미처 몰랐다. 원래 한국정치엔 관심도 없었지만 막판에 정몽준 망언까지 나오자 “장난들 치나”는 생각밖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솔직히 말해 이회창이 좋은가, 노무현이 이쁜가.
그런데 막상 노무현이 됐다는 뉴스를 듣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랬고 다음 순간 너무나 기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은 한국 국민들의 의외의 선택에 대한 충격이었고, 신선한 기대감이었다. 한국도 뭔가 달라질 수 있다, 구태의연한 정치판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나도 뭐 좀 뒤집어볼게 없을까?’ 만만한 게 집이라, 지난 주말 나는 부엌을 온통 들쑤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만 하면 되나. 남편도 불러세워 “연말이니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 좀 합시다”고 말을 꺼낸 나는 다른 건 다 관두고 신발장을 정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은 올해의 가장 챌런징(challenging)한 프로젝트였다고 우리 부부는 자신한다.
신발장은 현관문 왼쪽에 있는 제법 큰 스토리지 공간이다. 한 평 이상은 될법한 그곳은 위치적 조건 때문에 수많은 신발을 비롯하여 우산, 공, 청소도구, 운동기구, 안 쓰는 전자제품, 아이스박스에 텐트까지 보기 싫은 물건은 무엇이든 넣어두는 공간이 되었다. 안쪽에 8층으로 된 구두 선반을 들여놓았지만 여섯층을 모두 내 구두가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남편과 아들의 구두와 운동화, 슬리퍼등은 바닥으로부터 몇겹이나 쌓여있어서 슬리퍼라도 한번 찾아 신으려면 더러운 신발들을 헤집어야만 제짝을 찾아내곤 했다. 무엇이든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는 곳, 너무도 깊고, 어둡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곳이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열어 구두를 꺼내 신으면서도 청소할 엄두는 감히 내지도 못하던 곳이다.
나는 부엌 정리에 몰두하고, 남편이 열심히 안에 있는 것들을 들어내기 시작한 지 한 30분쯤 지났을까, 감격에 찬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바닥이 보여!” 가보니 과연 한 구석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바닥에 베이지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는 사실조차 우리는 잊고 있었다.
남편은 현관 앞에 엄청나게 쌓인 신발과 물건들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안에 것들을 끄집어냈다. 나중에는 현관문도 열지 못할 정도로 쌓였는데 그 물건들이란게 도무지 왜 오랜 세월 그곳에 들어가 있었는지 모를 것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이날 24켤레의 구두와 운동화를 버렸다. 또한 살이 부러진 우산 4개, 바람 빠진 공 4개, 테니스볼 한 100개쯤, 매년 받아와서 처박아둔 수많은 달력, 아들이 소풍가서 집어온 돌, 화분, 구두박스들, 옷걸이 한 묶음, 심지어 전에 키우던 개의 목걸이까지 모두 내다 버렸다. 아마도 이곳으로 이사온 6년전, 아들이 여섯 살 때부터의 우리집 역사가 다 그 속에 들어있었던 것 같다. 분명한 것은 그동안 나도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들의 신발은 물론 남편과 나의 것들도 꾸준히 골라내 버리느라고 버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장고에서도 많은 것이 나왔다. 열흘전 해먹고 남은 카레소스, 말라버린 버섯, 요리도 안하고 시들어버린 근대, 상치, 브로컬리, 당근, 오래된 살사 소스 등... 냉동칸에서도 오래된 생선과 김들은 다 꺼내 버렸다.
쓰레기통도 닦았다. 음식 찌꺼기를 버릴 때마다 튀어서 지저분해진 쓰레기통을 안팎으로 닦았다. 요리하면서 수시로 열고 닫는 선반이며 오븐의 수많은 손잡이들도 모두 소독종이타월(Clorox Disinfecting Wipes)로 깨끗이 닦았고, 마이크로웨이브 오븐, 토스터, 커피머신, 전기밥솥 등도 한번씩 닦아주었다.
남편이 두 손 가득히 버릴 것을 들고 수도 없이 지하 쓰레기장으로 날랐건만 집안에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특별히 깨끗해지지도, 넓어지지도 않았으니 이게 무슨 조화일까.
살아갈수록 느끼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데 그 몇십배의 것을 쌓아놓고 산다는 것이다. 사도 사도 결국 그것은 버릴 것이 된다는 것, 쓸데없는 것을 너무 많이 사들여놓고 있음을 올 연말에도 절실히 느끼며 반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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