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시험을 쳐서 뽑는다면 어땠을까.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되지 않았을까? 대통령을 조직력을 보고 뽑는다면 어땠을까. 역시 이후보가 되지 않았을까? 대통령을 자금력을 기준으로 뽑는다해도 역시 이후보가 당선되었을 것이다.
낙오의 쓴맛을 모르고 평생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그가 거대 야당의 조직과 자금을 양손에 쥔 채 대선에서 어이없이 패배하고 말았다. 2002년은 그에게 잔인했다. ‘대통령’은 일찌감치 따놓은 당상이어서 연말의 선거까지가 너무도 지루했는데, 그래서 한때는 표정관리가 힘들 정도였는데, 끝에 가서 ‘하늘이 두쪽이 나는’ 충격으로 막을 내렸다. “우리가 국민을 너무 몰랐다”“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고 한나라당측은 패인을 분석했다.
투표가 진행중이던 19일 민주당측은 ‘초상집’이었다. 몇시간 전까지 두손을 맞잡았던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가 돌연 공조파기 선언을 하면서 겨우겨우 유지해온 ‘박빙의 리드’는 물건너 간듯 보였다.
“특별한 자산을 갖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려고 하니 장벽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을 노무현 후보는 그날 거듭 토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이 승리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었던 이회창씨가 ‘특별한 자산’도 없는 노무현씨에게 패배한 이유는 무엇일까. 노무현씨에게 있는, 이회창씨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무엇일까.
해답은 그날밤 서울의 광화문 네거리에 있었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시작되던 무렵부터 광화문 일대는 노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노란 조끼 입은 사람, 노란 목도리 두른 사람들이 노란 풍선을 들고 몰려들었다. “광화문을 노란 물결로 뒤덮읍시다”라는 메시지를 받고 각처에서 모여든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다.
노무현을 위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들의 뜨거운 마음, 노란색만 보면 ‘노무현 지지 패거리’로 누구나 다 아는 대중적 인식이 이번과 같은 우열없는 선거에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본다. ‘노무현 매니아’들이 기적을 이루어 낸 것이다. 마음을 다 쏟아 지지를 호소하는 사람들을 직업적 선거운동 요원들이 당해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회창씨에게는 그런 매니아가 없었다.
민주주의의 선거는 ‘마음 농사’이다. 후보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기발한 정책을 내놓아도 유권자들의 마음을 수확하지 못하면 허사이다. 그래서 마음을 돈으로 사기도 하고, 지역감정의 질투심을 자극해 얻기도 하고, 비방 캠페인을 벌여 상대 후보로 향한 마음을 빼앗는 일들도 한다.
이번 선거에서 노당선자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음으로써 승리의 끈을 거머쥐었다. 시기적으로 민감하던 대미, 대북 입장이 젊은 세대와 호흡을 같이 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와 아울러 주목할 것은 나라의 지도자 상에 변화가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TV로 보도된 선거운동 광경을 보면 노 당선자는 자갈치 시장 아줌마들 속에 둘러 싸여도, 젊은이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유행가를 불러도, 독거 노인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어도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친화력이 있었다. 반면 이회창후보가 서민을 찾아나선 선거운동은 왠지 모르게 높은 분의‘시찰’같은 분위기를 띄었다.
이후보가 높은 데서 존경을 받는 ‘엄부(嚴父)’ 이미지라면 노당선자는 자녀와 스스럼없이 가깝게 지내는 요즘의 ‘좋은 아빠’ 이미지라고 할수 있다. 아버지상의 변화와 함께 젊은이들의 가슴을 열기 위해서는 지도자 상도 바뀌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씨를 ‘노짱’이라는 애칭으로 스스럼없이 부르는 노사모 회원들이 그 좋은 본보기이다. 한 회원이 노사모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그 동안의 걱정이 기우로 끝나고 노짱이 결국 대통령이 되는 군요. … 오늘의 승리는 우리나라도 선진 복지국가로 가야하는 역사의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 … ”
노무현씨의 소신과 배짱에 반해 자발적으로 탄생한 한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는 마음으로만 지원한 것이 아니었다. 지난 10월 노당선자의 후보지위가 당내에서 흔들리자 ‘희망돼지 저금통 분양’등 모금운동으로 한국에서 정치자금 모금의 새장을 열기도 했다. 그렇게 모아진 후원금이 70억원이었다니 어마어마한 힘이다. 노무현 당선자가 가졌던 자산, 정치발전을 위해 앞으로 한국의 모든 정치인들이 가져야할 자산이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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