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대한 글을 하나 써야할 일이 생기자 요즘 머리속에 항상 술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내가 처음 술을 마신건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이었다. 다들 내일이면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아쉽기도 했고, 1년을 무사히 마치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는 안도감과 설레임 때문이기도 했다. 들 뜬 분위기에서 어디서 났는지 보드카 1리터와 오렌지주스 한 갤론을 기숙사 우리 층에 사는 모든 학생들이 나눠 마셨다.
오렌지 주스에 섞어 마시니까 술맛을 잘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많이 마셨던 것 같다. 나는 내 룸메이트 레이첼과 그 다음날이면 유고슬라비아로 영영 돌아가는 이바나와 함께 끝까지 남아서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다음 날 아침 정신을 차려보니 내 기숙사 방 시멘트 바닥에서 엎드려 자고 있었다.
정오쯤 엄마가 데리러 오신다고 했기 때문에 서둘러서 짐을 꾸리고 샤워를 하고 말끔하게 옷을 입고 앉아있었지만, 머리가 돌로 때리는 것처럼 아팠다. 엄마는 초췌한 내 모습이 기말시험과 실기시험 때문에 무리를 한 탓이라 생각하셨는지, 집에 가는 길 내내 차안에서 꾸벅꾸벅 조는 나를 보며 안쓰러워 하셨다.
그 날은 마침 먼 친척 고모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초대하였다. 고모부는 대학 생활 1년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나를 환영하며 와인을 한 잔 따라주셨다. 코앞에 들이댄 백포도주잔에서 콕 쏘는 냄새가 느껴지자 울컥 속이 메슥거렸다. 나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고모부는 “이제 대학생이니 고모부가 주는 와인 한잔쯤 마셔도 된다”며 어머니 쪽을 쳐다보았다. 엄마는 “괜찮아, 고모부가 주시니까 한 잔 마셔”라고 말씀하셨고 난 절대로 마실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그 모습에 무척이나 흐뭇한 표정으로 엄마가 고모부에게 “쟨 대학생이지만 아직 저렇게 애기예요”하시며 애정어린 눈길로 날 쳐다보았다.
2학년때는 친한 친구들과 가끔 맥주를 마셨다. 학교 근처에 매주 수요일 저녁 맥주 한 핏처에 99센트 특별 세일을 하는 피자집이 있었기 때문에, 수요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친한 친구 네명이서 가끔 그 집에 갔다. 저녁밥을 든든히 먹고 가기 때문에 피자를 시켜먹지 않고 맥주만 마시고 오는 우리가 주인 아저씨 눈에 예쁘게 보였을 리 없지만, 갈 때마다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카드를 들고 가서 맥주를 마시며 카드 게임을 하거나 큰 소리로 쉴 새 없이 웃으며 수다를 떨거나 하였다. 그 때만 해도 신분증 검사를 철저하게 하지 않던 때라, 만 스물한살이 안 됐었지만 얼마든지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한번은 카드 게임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두 핏처나 비우고 넷이 다 거나하게 취했다. 네 사람 다 피아노 전공이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우리 이대로 연습실로 가서 피아노 한번 쳐보자고 제의하자 우루루 몰려갔다. 피아노 두 대가 있는 방에서 서로 돌아가면서 피아노를 치는데, 그렇게 잘 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팽배하게 느껴진 적도 처음이고, 그렇게 마음대로 손이 안 돌아가면서 엉망으로 피아노를 친 적도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잘 칠 것 같은 마음에 다들 비켜, 비켜 하며 서로 피아노에 앉아서 연주를 했지만, 금방 말도 안되게 엉망인 자신의 소리를 믿을 수 없어하며 연주를 멈췄다. 흥겨웠던 기분은 연습실에 들어간지 10분도 안 돼서 다 가라 앉아버리고, 난 술이 취했을 때는 절대로 연주를 하면 안 된다는 걸 배웠다.
음악가들이 마약이나 술에 취해서 무대에 서서 연주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잘 이해가 안 간다. 내가 아는 한 적어도 내 주변의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은 술에 취해 무대에 서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대신, 연주가 끝나고 나면 그 동안 준비하느라 스트레스 받으며 고생했던 긴 시간과, 무대로 나가기 직전에 느꼈던 공포스러운 긴장감, 아드레날린이 넘치던 무대 위에서의 경험 등을 풀어버리려고 술을 마시는 이가 적지 않다.
특히 친한 친구나 선후배의 연주가 끝난 후, 서로 술 한잔 권하며 축하하는 자리는 매우 흥겹고 즐거운 자리이다. 가끔은 아주 새침하고 얌전한 후배도, 연주가 끝나고는 채 가시지 않은 긴장감, 흥분, 그리고 성취감에 도취되어 술을 한 잔 마시고 약간 풀어진 모습을 보게된다.
성악을 전공한 친구들과 술이 취해서 노래방에 가면, 말도 안되게 높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술이 취할수록 점점 더 목소리가 높아져서, 나중엔 처음부터 끝까지 가성으로만 부르게 된다. 도대체 들어줄 수가 없을 정도일 때도 있는데, 아마도 술에 취하면 목소리가 더 높이 올라갈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나보다.
결론은 술과 음악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음악을 학문으로 택해서 전공하고,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에게 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 맞는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을 좀 더 흥겹게 하는 역할로서의 술은 대단히 훌륭하다. 물론 적당한 양을 마셨을 경우에 한해서인데, 적당한 양은 비단 술뿐만 아니라 살아가며 내가 취해야 할 모든 부분에 해당하는 제약일 것이다. 적당한 양을 넘었을 때 더 이상 즐길 수 없다는 것은 술이 가르쳐주는 인생에 대한 큰 교훈이다.
새라 최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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