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부글부글 끓어요. 마음을 다 비웠다고 생각했는데도 속이 편해지질 않네요. 하루에도 열두번씩 혼자 욕심을 냈다, 혼자 마음을 풀었다 하지요”
12학년 딸을 둔 한 동료직원의 요즘 심정이다.
대학 입학원서 제출 시즌이 되면서 진학생 자녀를 둔 가정마다 살얼음판 분위기이다. 부모는 애가 타는데 정작 대학에 가야 할 당사자는 천하태평인 경우, 진학 스트레스로 자녀가 집에서 말 한마디 안 하는 경우, ‘공부’ ‘성적’ ‘대학’ 등의 단어만 입에 올려도 자녀가 반발을 해서 한바탕씩 언쟁이 붙는 경우, 혹은 아이가 최선을 다하는 데도 성적이 안 올라 낙심해 있는 경우… 사정은 조금씩 달라도 안타깝고, 속 상하고, 조마조마하기로는 12학년생 부모들 대부분이 비슷하다.
동료 직원의 딸은 학교 성적은 우수한데 SAT 점수가 기대만큼 나오지 않는 케이스이다.
“아이의 손톱이 남아나질 않아요. 스트레스 때문에 손톱을 다 물어 뜯거든요. SAT 점수가 전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게 대학 문턱을 가로막고 있으니 어쩌겠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 자녀가 그 문턱을 넘도록 도와주고 싶은 것, 억지로라도 등 떠밀어 넘어서게 만들고 싶은 것이 진학생 부모들의 마음이다.
한국에서 등하교 길은 곡예였다. 지독한 만원버스 속에서 궤짝처럼 실려 다니며 중·고등학교 6년을 보냈다.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우르르 몰려드는 승객들의 기세에 눌려 어물어물하다 보면 매일 지각이다. 끄트머리로라도 기어이, 그리고 두발이 안되면 한발이라도 승강구 계단에 올려놓으면 일단 목적지까지 가는 것은 보장이 된다.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키면서 부모들이 무의식중에 갖는 생각도 그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꼴찌로라도 버스에 올라타기만 하면 목적지에 도착할 텐데”라는 생각.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싫다는 아이 억지로 학원에 보내고, 아이와 싸워 가면서까지 SAT 시험을 한번이라도 더 보게 한다.
“시간은 위대한 이야기꾼이다”는 아일랜드 속담이 있다. 추수감사절 휴가를 맞아 타 지역에서 대학이나 직장에 다니는 자녀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 입학원서 쓰면서 스트레스를 받은 지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 이상이 된 자녀들이 저마다 지난 시간만큼의 이야깃거리를 한 보따리씩 들고 돌아왔다.
대학생활을 알차게 즐기는 학생이 있는 가하면, 대학 입학 후 부모에게 분풀이라도 하듯이 방종한 생활을 하는 학생, 컴퓨터 게임에 빠져 수업 빼먹기를 밥먹듯 하는 학생, 마약중독으로 대학 입학한지 5년이 되도록 졸업을 못하는 학생, 그리고 대학졸업 후 바라던 직장에 취직해 의욕에 넘치는 신입사원이 있는가 하면 취직이 안돼서 몇 년째 허드레 일하면서 이력서만 쓰는 청년… 12학년 늦가을, 입학원서를 쓸 때는 비슷비슷하던 아이들을 시간은 천차만별의 처지와 모습들로 바꾸어 놓았다.
자녀들의 주변 이야기를 들으면서 분명해지는 것은 대학은 ‘버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올라타기만 하면 목적지까지 저절로 가는 전자동 이동수단이 아니다. 학생 스스로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교과과정을 택하고 특별활동을 통해 인맥과 경험을 쌓아야 졸업후의 진로가 열리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 대학생활은 너무 유혹이 많다”고 대학을 갓 졸업한 한 사회 초년병은 말한다. 생전 처음 부모의 감시권을 벗어난 해방감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정도인데 술, 담배, 마약, 이성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 자신의 의지보다 부모의 입김에 익숙한 아이들일수록 저항력이 떨어지는 부분이다.
걸어서 세계를 일주한 여성 여행가 한비야씨가 한 여행기에서 이런 말을 썼다. 킬리만자로, 에베레스트 등 세계의 높다는 산들을 오르면서 깨달은 것은 “정상까지 오르려면 반드시 자기 속도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대학입학은 정상의 초입에 불과하다. 입학원서를 제출하면서, 초입까지의 단거리보다는 정상까지의 장거리를 내다보는 눈이 필요하다. 자기 속도로 가는 사람만이 멀리 갈 수가 있다.
권정희 편집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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