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동네에 늘 오시던 채소장사 송씨 아저씨가 계셨다. 확성기도 없을 때였는데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건너 마을에서 소리가 나면 엄마는 미리 돈을 준비하고 기다리셨다. 시장이 한시간 넘게 걸리는 신촌 로터리에 있었던 터라 송씨 아저씨의 리어카는 유일한 반찬 공급원인 셈이었다.
막내 동생은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동네 어른들이 물으면 열이면 열번 “송씨 아저씨”라고 답해서 어른들을 웃겼다. 이유인즉 “공부가 싫어서…” 어린 소견에 송씨 아저씨의 일은 공부 안 해도 될 일로 알았는지…
우리 땐 중학교 입시가 있을 때여서 엄마의 닦달로 고달픈 초등학교 시절을 보낼 때였다. 누나와 형들이 당하는 고초를 본 막내는 공부를 안 하리라고 굳게 결심한 모양이었다. 막내 동생은 늘 엎드려서 그림만 그려댔다. 동생의 소원대로 동생 때엔 중·고교 입시도 없어진데다가, 엄마도 위의 아이들 치다꺼리에 지쳐서 넷째인 막내가 공부를 하든 말든 별 신경을 안 쓰셨다. 아버지는 막내의 학년도 모르고 지나갔을 거라고 엄마는 말씀하시곤 했다.
그림에만 열중하더니 미술대학엘 들어갔다. 교수님의 화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줄곧 학비와 재료비를 벌어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더니 대학 다니면서 엄마의 용돈도 드렸다고 한다. 줄곧 향토 장학금?으로 공부시킨 위의 세 아이보다도 훨씬 효자라며 엄마는 무척 좋아하셨다. 엄마는 “얘가 모자란 애가 아닌 모양이다… 제 앞가림을 썩 잘한다…” 하고 내게 슬그머니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대학원도 제가 벌어 다니더니 졸업 후에 국영 방송국에 공채합격을 했다. 150대1의 경쟁률을 뚫었다나? 우리 형제들은 다 못 믿겠다 했는데 사실이었다. 공부에 늦게 눈뜨는 사람도 있다더니… 몇 년 뒤엔 다른 방송으로 스카웃 되어 가더니 무대 디자인으로 ‘대한민국 방송대상’이란 것도 탔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문과 방송에도 나왔다고 한국에서 신문을 한 장 보내왔는데 막내 ‘꺼벙이’가 웃음을 날리며 인터뷰한 사진이 크게 나와 있었다.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다’를 대변하듯이…
이곳 할리웃에 있는 스튜디오에 무대장치 견학 차 가끔 오는 동생과 만났다. 너무 바빠 동생의 호텔로 가서 잠깐 만날 뿐이지만 멋쟁이 무대 디자이너로 관록이 붙어 보이는 동생이 보기 좋았다. “일은 어떠냐?” 했더니 바쁘지만 재미있단다. 밤샘 작업이 일쑤이고 정해진 퇴근시간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지루하거나 힘든 줄 모르겠다고 한다.
작년 여름방학 이곳을 다녀간 막내 동생의 두 아이. 건강하게 자란 제 아비를 닮은 두 조카를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공부 잘하니?” 내 질문에 “넷! 저는 체육 잘해요” “저는 노래도 그림도 잘해요” 하던 두 조카. 공부와는 적당히 담쌓은 듯 보였다. 꼭 저처럼 키웠다 싶었다.
“학생이 공부 잘하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이 아닌 기본”이라며 막내의 성적표를 보시곤 실망하셨던 아버지. 아버지도 엉뚱한 이 조카들을 보시면 허허 웃으셨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요즈음 ‘돈 벌리는 일’ 보다는 ‘하고싶은 일’ 을 하려는 사람들이 늘어간다고 한다.
아이 학교의 수학 선생님은 미항공우주국(NASA)의 유능한 과학자였는데 지난 학기부터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궁금한 아이들이 질문하니 전부터 ‘하고 싶던 일’이라고 했단다.
내외가 공인회계사인 친구 부부는 전부터 하고 싶던 식당을 차려 제2의 삶을 살겠다고 장소를 열심히 물색중이다. 은행 감독원에 다니던 친구 남편은 IMF 때 본의 아니게 이민 와 궁리 끝에 옷가게를 열더니 이제야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았다고 너무 행복해 한다. 신문기자였던 선배는 부동산 중개업으로 직업을 바꾸더니 탑 세일즈 우먼이 되었다가 지금은 큰 부동산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고3짜리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많고 많지만, 아이가 평생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삶을 위한 준비단계로 대학을 가고 전공을 찾았으면 좋겠다.
이름이 나지 않아도… 날리는 직업이 아니라도… 돈을 많이 못 벌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금상첨화로 남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세월이 변하고 흐른다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이 행복한 삶’ 이 말은 진리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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