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떨고 있니?”라고 하면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안다. 누가 왜 떨고 있는지 상황 설명이 필요없다. 95년초 한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끈 TV 드라마 ‘모래시계’에 나온 대사이기 때문이다.
송지나 작가·김종학 PD 콤비가 펄펄 날리던 시절 만든 이 드라마는 조직폭력배, 검사, 운동권 출신인 카지노 대부의 딸등 세 젊은이가 70년대와 80년대 한국의 암울한 시절을 통과해 나가는 과정을 다뤘다. ‘모래시계 세대’‘모래시계 신드롬’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사회적 반향이 대단했는데, ‘떨고 있니?’는 그 마지막회에 나온 대사이다. 시청률이 64.5%까지 치솟은, 거의 한국민 전체가 지켜본 최종회에서 사형 직전의 정치깡패 태수는 친구인 검사 우석에게 안겨 묻는다 - “나, 떨고 있니?”
죽음의 공포를 극도로 절제하며 통곡을 한가닥 말로 뽑아낸 듯한 이 대사는 한국민의 정서에 참 잘 맞는다는 생각이다. 절망의 현실 앞에서 은근과 끈기, 의연함으로 버티기는 하지만 정작 절망의 무게는 1그램도 덜어내지 못하고 고스란히 다 감수하는 민족, 그래서 가슴에 늘 한이 들어찬 민족의 정서이다.
미국 영화를 보다 보면 너무 정서가 달라서 입가에 미소가 번질 때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절망적 현실 앞에서의 태도이다. 한국사람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나, 떨고 있니?”가 딱 들어맞을 상황에서 미국 영화의 극중 인물들은 종종 농담을 주고받는다.
예를 들면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1969년 명화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 The Sundance Kid)’. 20세기 초 전설적 은행강도들인 이들이 볼리비아에서 최후를 맞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독안에 든 쥐처럼 완전포위 당한데다 총상까지 입어 탈출 가능성은 극히 희박한 벼랑 끝 상황에서도 둘은 티격태격 말싸움도 하고, 은행과 여자가 맛있게 농익었다는 땅, 호주로 가자며 호기를 부린다.
상황이 아무리 심각해도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대처하는 낙천주의는 미국인들의 특질이다. 때로는 너무 경박해 보이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우리같이 늘 심각하게만 살아온 민족에게는 부러운 기질이다.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 행복 추구의 권리, 그리고 안전이 보장되는 환경에서 오래 살면서 형성된 사회에 대한 근본적 믿음이 낙천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같다.
미국인들이 그 특유의 낙천적 여유를 잃어가는 것일까. 공화당 압승으로 끝난 이번 중간선거 결과는 그런 의구심을 갖게 한다. 유권자들은 후보 개개인이 마음에 들어서라기 보다 부시에 대한 지지의 표시로 공화당에 표를 던졌다는 것이 일반적 분석이다. ‘안보’와 ‘애국’을 지상과제로 삼는 부시의 호전적 전략이 국민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민주당은 공화당 정책 비판이 마치 ‘애국’ 비판같이 되어버린 어정쩡한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참패를 당했다.
9.11 테러사건으로 안전에 대한 위협을 느낀 미국민들이 마음의 여유를 잃으면서 사회가 경직되어 가는 분위기가 여기 저기서 느껴진다. 미국의 자랑인 ‘표현의 자유’에도 회의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수정헌법 제1조인 ‘표현의 자유’ 연구센터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수정헌법 제1조가 너무 많은 자유를 허용한다”는 의견이 49%에 달한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라면 언론기관의 보도도 어느 정도 규제되어야 하고, 종교단체들에 대한 감시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공’ 앞에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던 지난 수십년 한국의 현실을 상기시킨다. ‘애국’과 ‘안보’는 중요하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다른 생각들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열린 분위기, 미국적 분위기이다.
지난달 빌 클린턴 전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다. 독일은 요즘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한 반대 여론으로 반미정서가 심각하다. 그런데 클린턴이 그곳에서 받은 환대는 엘비스가 무색할 정도였다고 한다.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는 “클린턴이 미국적 낙천주의의 표상처럼 보이는 것이 인기의 비결이었다”고 썼다.
“나, 떨고 있니?”는 미국적이지 않다. 미국사회가 어서 본래의 여유를 되찾았으면 한다.
권정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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