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천리. 지난 주 우리 교회 성가대 수련회에서 배운 사자성어이다. 느릿느릿한 소걸음으로 꾸준히 가다 보면 어느새 천리를 간다는 내용으로, 성실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이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말이 있을까. 피아노를 전공하려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연습하고 레슨을 받아야만 하는데, 많은 전공자들은 예술 중학교나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중·고등학교 과정부터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고 그 후에 음대 기악과나 콘서버토리에 진학하여 다시 4년간의 전공 수업을 받게 된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혹은 졸업 후, 국제 콩쿠르에 입상하고 전문 연주가의 길을 가는 사람은 물론이요, 학교나 개인 스튜디오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피아니스트들도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새로운 곡을 배우고 기교를 연마해야만 한다. 솔로 악기를 위해 작곡된 곡 중, 가장 많은 곡이 피아노를 위해 작곡된 만큼 세상엔 평생에 걸쳐서 배워도 다 못 배울 만큼의 피아노 곡들이 산재해 있다.
이미 유명해진 연주자라고 해서 이 평생에 걸친 꾸준한 노력과 연마를 게을리 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어느 겨울 오후, 주말에 집에 가기 위해 학교가 있는 볼티모어에서 한시간이 넘게 운전하여 오는 동안, 라디오에서 하프시코드 연주가 흘러나왔다. 마침 나도 하프시코드를 부전공 악기로 택해서 공부하고 있던 터라 볼륨을 올리고 주의 깊게 들으며 운전을 하는데, 너무나 훌륭한 연주여서 나는 눈 쌓인 길을 운전하고 있다는 것도 잊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연주가 끝나지 않았기에 히터를 틀어놓은 채로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려 연주자의 이름을 들었다. 다름 아닌 마르타 아르게리치였다. 세계 정상의 위치에 선 피아니스트인 그녀가 뒤늦게 하프시코드를 공부하여 연주를 한 것이었다. 그 때의 놀라움과 한대 맞은 듯한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녀의 신들린 듯한 연주가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의 자세에서 나온 결과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졸업을 코앞에 두고 취직을 위해 여기 저기 알아보니, 정기적으로 연주할 기회를 부여받으며 좋은 환경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은 모두 재학 중 매우 성실했던 사람들이었다. 선생으로 취직을 한다고 해도, 1년에 한두번씩 꼭 학교 정기 연주회에서 연주를 해야 하며, 가끔 학생들이 가져오는 곡 중 모르는 것을 익혀야 할 때고 있고, 학생 혹은 다른 교사의 연주의 반주를 할 기회도 많으니 성실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오히려 그 때 가서 열심히 하려고 하면 뭔가 늦은 감이 있을 수도 있다. 이미 그 전에 쌓아놓은 초견 실력과 음악적 기교적 기초실력, 그리고 많은 레파토리 등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태에서 섣불리 교사의 자리에 채용이 된다고 한들 큰 어려움이 뒤따르리라 생각된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피아노라는 악기가 하루아침에 부쩍 잘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라는 뜻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 연습을 하다 보면 보통 하루 연습량의 약 4분의3이 어제 배우고 익힌 것의 복습이고 나머지 4분의1만이 새로 무엇인가를 배우는 시간임을 깨닫는다. 그러니 하루를 쉬고 그 다음 날 다시 연습을 하려 한다면 평소 연습 시간의 두배를 한다고 해도 매일 일정량을 연습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어쩌다 정신통일이 잘 안 되는 날 연습을 할 경우엔 그 날 연습량이 결코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날 익힌 것의 복습도 제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익혀나간 것이 쌓여서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기교를 연마하고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우보천리(牛步千里)의 가르침이 내게 와 닿는 이유는, 느릿느릿한 소의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꾸준함에 대한 교훈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동료들과 선배 후배들이 저만큼 천리 앞에 서서 점점 더 멀어지는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한다면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난 이미 우보(牛步)로 그들을 따라잡기에는 늦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좀처럼 쉽게 용기를 낼 수 없는 나이가 됐다. 흘러가는 시간은 막을 도리가 없기에 우보천리의 가르침이 더더욱 가슴에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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