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으로 만난 중년 5명, 전시공간‘갤러리 3’오픈
‘아줌마’들의 조용한 혁명이 시작됐다. 맞벌이에 지치고, 이민생활에 찌들고, 아이들 뒷바라지가 바쁘고... 30~40대 여성들에게 흔히 붙어온 수식어에서 벗어나려는 날개 짓일까. 삶의 질을 높이는 문화생활에 목말랐던 한인주부들이 ‘여성문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공간을 오픈했다. 세리토스 인근 레이크우드시에 자리잡은 ‘갤러리.3’. ‘내 것’을 찾고 싶은 여성들의 공간이며, 1세 주부들이 2세 자녀들에게 우리 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엄마’에 가려진 여성, 오래 전 잊었던 자신을 다시 만나보고 싶은 그녀들이 찾아봄직한 그런 곳.
손수 벽 만들고 페인트 칠
문을 열고 들어서면 눈부시도록 깨끗한 공간이 반듯하게 다가온다. 산뜻하고 고즈넉하면서도 수준과 감각이 느껴지는 공간. ‘아줌마들’과 그 남편, 자녀들이 힘을 모아 페인트하고, 조명 달고, 벽을 세워 만들었다는 이곳은 화장실과 암실 마저 아름답다.
손 청(50), 김인옥(42), 이화선(45), 성신애(47), 준 리(47)-중년여성 5명이 함께 일하는 ‘갤러리.3’은 사진작가 함철훈씨가 설립한 V.W.I.(Visual Worship Institute)의 부설화랑으로 지난 7월6일 개관했다.
함씨로부터 기초과정을 배우고 어드밴스 과정까지 수료한 이들이 2년반 동안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하나된 마음으로 남다른 문화사업을 꿈꿔온 결과다.
앞장 선 사람이 함철훈씨의 아내이며 수제자인 손청씨. 화랑 운영의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큰 일’을 벌인 이유를 그녀는 “우선 내가 필요해서”라고 간단히 설명한다.
보통 엄마들의 작은 쉼터
“샌호제에서 10년을 살았는데 갈 데가 없었어요. 남가주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죠. 어바인 살 때 LA에 그림이 있는 찻집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는 너무 반가워서 택시를 타고 가본 적도 있는데 얼마 후 없어졌다는군요”
LA가 문화의 불모지라는 변명은 뒤로하고, 이민사회에서 양질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너무나 없다는 손씨는 자신처럼 목마른 중년 여성들, 평범한 엄마들이 마음껏 쉬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을 그리워하다가 직접 만들기로 했다.
“작은 공간이지만 우리 문화를 역량껏 보여줄 수 있는 행사들을 하고 싶습니다. 작은 음악회도 열고, 판소리도 하고, 아이들에게 우리 것을 보여주는 곳이 되었으면 해요. 정직하고 솔직한 전시회도 많이 하려고 합니다. 이름 없는 작가라도 작품이 좋으면 걸어야죠”
손씨의 이 계획들은 뜬 그름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벌써 알차고 좋은 행사들이 잇달아 열려 놓친 사람들을 후회하거나,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문화강좌-음악회등 꽉차
개관 기념전은 ‘갤러리.3’의 여성 5인의 사진전으로 지난주까지 두달간 계속됐고 14일부터는 뉴욕의 1.5세 만화작가 한창호씨의 만화전 ‘토산묵상’이 열리고 있다.
오는 10월에는 V.W.I. 제10기 ‘보이지 않는 손’ 사진전, 11월중 강현애 조각과 유화전, 12월엔 생활공예 및 자기전이 이어지고 내년봄 다기전도 계획돼있다.
전시회보다 더 관심이 가는 건 틈틈이 열리는 문화강좌와 음악회들. 지난 7월25일에는 ‘여성 사회학자가 읽은 나혜석의 삶과 그림’(동국대 조은 교수)이 개최됐고, 8월18일 ‘한 여름밤의 음악과 영상’ 기획으로 이승병의 알토 색서폰 연주회가 열렸으며 8월22일 ‘이스라엘 현지인이 본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성현경 목사) 강좌가 있었다.
올 가을에는 인류학자 최정무 교수(UC어바인), 작가 이자경씨, 정신대 문제에 관한 정현진씨의 강좌가 계획돼있고 10월25일엔 시인 김영교씨가 이곳에서 출판기념회를 하기로 예약해 놓았단다.
또 12월에는 김영배씨 기타 연주회와 박찬응 교수(오하이오 주립대)의 창 연주가 있을 예정.
문턱없애 누구든지 활용
행사들 하나 하나가 너무 거창하지 않으면서도 특이하고 흔히 접하기 어려운 내용들이라 흥미롭다. 손씨의 설명대로 사느라고 바빠 외면하거나, 관심 안 가져서는 안 되는 이야기들.
“우리 갤러리에는 문턱이 없습니다. 거품 빼고 계급장 떼고, 누구나 문을 밀고 들어와 전시도, 공간도, 커피도 공짜로 즐길 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활짝 열었는데도 오기가 익숙지 않은가 봐요. 삶의 1순위가 언제나 아이들인 어머니들, ‘내’가 없는 한인 여성들이 가끔씩 다 털어 버리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나오면 좋겠어요”
손씨는 “욕심 없이 시작했지만 나름대로의 비전은 갖고 있다”고 말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지역사회의 문화를 책임지려는 용기, 모든 아이디어를 동원해 이 공간을 여러 각도로 활용할 의욕에 가득 차 있다.
갤러리의 뒤에서 직간접으로 후원하는 함철훈씨는 예술은 특별한 사람들이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지금은 아름다움의 기준이 무너진 사회, 모든 평범한 것들이 최선을 다할 때 지고의 아름다움이 있고, 누구든지 미를 살릴 수 있는 자질을 가졌다고 그는 강조한다.
“사실은 쾌재를 올릴 일입니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니죠. 스스로들 모두 자랑스러워해요. 사진에서 시작해 각자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운동이 커져 일이 이렇게 됐거든요. 카메라를 메고 다니면서, 작은 것과 하찮은 것을 렌즈에 담아보면서, 그리고 이 갤러리를 시작하면서 아줌마들의 사고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남편-자녀도 자부심 느껴
집에서 살림만 하던 전업주부들이 갤러리를 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문화공간에서 일하니까 애들이 더 좋아하더란 것이다. 벽에 작품을 건 엄마. 화랑에 나가 일하는 엄마. 음악회와 강연회를 준비하는 엄마...
세 아이를 키우는 이화선씨는 평소 아무 말 없던 남편이 남들 앞에서 “힘든데 열심히 하더니 아내가 작가가 됐다”고 자랑하는 것을 듣고 너무 놀랐다고 감격한다.
손청씨는 대학 2년생인 아들이 갤러리에서 일하고 싶다며 쫓아 나와 돕더니 “이 문화사업은 엄마 대에서 끝날 일이 아니라 자기네 언어, 자기네 세대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아줌마’들은 입을 모아 여성들도 전문성 갖출 때 가족으로부터 인정받는다고 말한다. 부모가 자녀보다 잘 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아이들이 다르게 보는데 그 하나가 문화활동일 때는 가치가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또한 살림하는 것 외에 신경 쓸 일이 하나 더 있으니까 애들에게 잔소리도 덜 하게 된다고 여러 이점들을 열심히 피력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한인사회의 지역마다 이런 공간이 자꾸 생겨났으면 하는 것. 중년여성들이 숨을 쉬고, 황폐해진 정신 에너지를 사용할 장소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호소다.
“아침에 일찍 나와 촛불을 켜놓고 앉으면 마음에 조용한 여유가 생깁니다. 집에 있으면 괜히 이것저것 할 일이 많고, 마음부터 바쁘잖아요? 차라리 밖에 나오면 더 여유가 있어요. 책도 보고, 전시도 보고, 좋은 사람들 만나 대화를 나누다보면 아이들과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만의 새로운 언어가 생깁니다”
화~일요일 개관 원은 휴관
물론 조금은 고상해서 집에서 살림만 하던 주부가 덥석 들어가기엔 왠지 거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준 좀 올려보면 안되나? 그러자고 만든 공간이다.
“서두르지는 않습니다. 돈벌 생각은 하지도 않으니까요. 좋은 전시를 많이 해서 좋은 이름이 남기를 바랍니다”
갤러리 오픈 시간은 화~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 일요일은 오후 1시부터 5시. 월요일은 휴관한다.
주소와 전화번호, 웹사이트는 Visual Worship Institute/ Gallery 11421 E. Carson St. # J Lakewood, CA 90715 (562) 653-1166. www.vwinstitute.com
▲▲공간 한쪽에 벽을 세워 만든 기프트샵. 일반 서점에서 구하기 힘든 문화예술 관련 서적들과 사진카드, 액자 등을 판매한다.
▲지난 7월25일 있었던 ‘여성 사회학자가 읽은 나혜석의 삶과 그림’ 강연회. 조은 교수(왼쪽)가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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