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쌍둥이 빌딩을 보면서 방향을 잡곤 했어요. 9.11 사건이 나고 보니 그게 단순히 지리적인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쌍둥이 빌딩은 내 삶의 초점이었어요”
9.11 참사 1주년 특집기사들을 읽다가 눈에 띈 구절이다. 뉴욕 세계무역센터 근처의 한 고등학교 여학생이 뉴스위크에 기고한 글이다. 11학년인 이 학생은 매일 아침 등교할 때마다, 그리고 방과후 기차역으로 걸어갈 때마다 눈앞에 우뚝 서있던 쌍둥이 빌딩을 회상하면서, 빌딩은 없고 망망한 푸른 하늘만 있는 허공의 생경함을 이야기했다.
“초점이 사라지고 나니 낯선 곳에 와있는 느낌이에요. 확실한 건 이제 아무 것도 없어요”
단단한 바닥이라는 데 한점 의심 없이 발을 내디뎠는데 뜻밖에도 허방이어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 ‘불확실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정신적 공황은 1년전 우리 모두의 경험이었다. 미국이 공격을 당하고, 물질문명의 상징이 쓰레기더미로 무너져 내리며, 수천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는 사건을 목격한 후 우리는 성조기의 물결을 만들고, 우르르 방독면을 사고, 데면데면 지내던 가족·친지들을 새삼 챙기면서 지난 가을을 보냈다.
시간은 흐르고, 흐르는 시간을 따라 망각이 찾아들면서 대부분 우리의 삶은 다시 타성에 젖은 나른한 반수면 상태로 되돌아 와있다. 그러나 테러의 칼날이 직접 내리꽂힌 희생자 가족들에게 ‘9.11’의 시제는 여전히 ‘현재’일뿐이다.
딸 박계형씨(당시 28세)를 잃은 뉴욕의 신정혜씨는 “사고 직후나 지금이나 (딸의 죽음이) 실감 안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계형씨는 무역센터 빌딩 89층의 메트 라이프 직원이었다. “엄마, 우리 사무실에서는 자유의 여신상이 바로 보여!”라고 자랑하던 그 밝은 목소리로 “엄마!”하며 문을 들어설 것 같은 느낌에 신씨는 지금도 땅거미질 무렵이면 가슴을 두근거린다.
남편 이동철씨(당시 48세)를 잃은 버지니아의 서정미씨(43)도 “남편이 출장 갔다 금방 돌아올 것만 같다”고 했다. 보잉사에서 근무했던 이씨는 그날 아침, 출장길에 탔던 비행기가 국방부 건물을 들이받으면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처음에는 죄책감이 찾아들더군요. 사소한 일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다툰 일들이 다 마음에 걸렸어요. 말 한마디라도 더 잘 할걸, 좀 더 사랑으로 감싸줄 걸 하는 후회들이었지요” 인생의 초점이었던 존재가 갑자기 증발하는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 고통이었다. 서씨는 일주일새 몸무게가 10파운드나 줄었고, 신씨는 3개월간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너무 깊은 아픔은 사람을 정제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일까. 전화를 통해 이야기를 나눈 신씨와 서씨의 목소리에서는 간간이 복받치는 울음에도 불구, 초연한 평온이 느껴졌다. 용광로의 고열이 불순물들을 녹여내고 나면 순도 높은 금속이 얻어지듯이, 자식을, 남편을 억울하게 잃고 난 두 여성에게서는 슬픔으로 정화된 깨끗함이 느껴졌다. 삶에 끼여든 욕심과 허영같은 불순물을 다 태우고 나면 “보다 큰 차원으로 눈길이 간다”고 서씨는 말했다.
“얼마 안 살다 가는 인생인데 작은 일로 마음 상하고 옥신각신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지요”
그가 말하는 ‘큰 차원’이란 신의 섭리로 해석된다.
“내가 원하든 안 원하든 어떤 환경이 주어지면, 그 삶에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살려고 애쓰고 있어요”
서씨는 14살, 13살, 9살의 삼남매를 혼자 키우고 있는데 신앙심 깊던 남편과 생전에 나눈 대화들이 현실을 버텨내는 힘이 된다고 말했다.
신씨가 “속 한번 안 썩이던 반듯한 딸”을 잃은 후 얻은 결론은 “세상에 제일 중요한 것은 건강과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전에는 저축 하나라도 더 하려고 안달을 했지요. 이젠 그런 것 다 소용없어요. 생명을 가지고 우주만물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지요”
9월11일, ‘비극의 날’은 삶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하는 날이다. 살아서 가족들과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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