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를 보자는 것은/신발을 보자는 거다. 여태껏 어떤 신발을 신어왔느냐/무슨 신발로 어느 길을 거쳐왔느냐/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장호 ‘신발과 이력서’ 중)
한국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총리가 탄생하느냐 마느냐로 시끌시끌하던 때 우연히 눈에 들어온 시구이다. 장상 총리서리 인준 청문회는 말하자면 ‘신발 검사’였다. 국회는 그가 여태껏 어떤 신발을 신어왔는지, 무슨 신발로 어느 길을 거쳐왔는지, 그것을 현미경을 들이대며 문제삼다가 결국 임명동의안 부결로 끝을 맺었다.
최초의 여성 총리 탄생이 한바탕의 입씨름으로 무산되자 한국의 여성계는 매우 애석해 하는 분위기이다. "장 총리서리는 잔인한 남자들의 정치판에 희생됐다" "그만한 여성 지도자를 어떻게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는가"라며 분노하고 있다. 그런 안타까움의 이면에는 "여성이기 때문에 공정한 평가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이 없지 않다.
총리서리로 임명된 직후부터 언론과 국회의 관심은 총리로서의 국정수행 능력 여부보다는 아들의 국적문제, 졸업학교명 오기, 부동산 투기 의혹, 위장전입 등 전문분야 외적 과거의 행적에 치중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걸어갈 길에 초점을 맞춰야지 왜 먼지 묻은 ‘신발’만 들여다보느냐는 것이 여성계의 불만일 것이다.
장상 총리지명 및 일련의 사태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 지위의 하한선과 상한선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하한선을 상징하는 것은 ‘여성표’이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장 총리서리에 대한 트집거리가 꽤 확보된 후까지도 당론 결정에 고심한 것은 여성표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
몇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행여 여성표를 잃지 않을까, 여성계를 자극하지 않을까라는 위험부담과 장 서리의 도덕성에 대한 비판 여론 중 어느 쪽에 무게를 두어야 할지를 두고 상당한 저울질이 있었다. 여성들은 이제 최소한 한 표로서의 비중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한선을 상징하는 것은 ‘여성 카드’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장 총리서리 임명이 ‘여성 총리 카드’를 이용한 ‘깜짝쇼’라는 것은 정치 문외한들도 아는 사실이다. 아들들 비리로 가속화한, 혹은 아들들 비리가 터질 정도로 심각해진 권력누수 현상을 막고 남은 임기를 별 말썽 없이 넘기기 위해 꺼낸 카드가 ‘여성 총리 카드’ ‘장상 카드’였다.
’카드’란 무엇인가. 국면전환용으로 한번 써보는 것이 ‘카드’이다. 극도의 레임덕 현상에 휘말린 정권이 임기 몇 달을 안 남기고 내세운 여성 총리는 여성에 대한 능력 인정이라기보다 일개 ‘카드’라는 것을 여성들은 아파도 인정해야 한다.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의 뜻이 분명했다면 정권이 일할 힘과 시간을 가졌을 때 임명했어야 했다.
그렇기는 해도 첫 여성 총리 탄생 좌절에 여성들이 가슴 아파하는 것은 오늘날 여성들의 지위가 그런 ‘카드’들의 이정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배 세대가 ‘카드’로, ‘구색’으로 옹색하게나마 문을 열면, 그 문을 통해 후배들이 능력을 인정받으며 들어가 한 뼘씩 한 뼘씩 지평을 넓혀온 것이 사회 각 분야 여성들의 진출사이다.
총리서리 문제가 한국민의 관심을 부여잡고 있던 한편에서는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운동이 진행중이다. 경기도의 안성에서는 남성후보와 여성후보가 ‘성의 대결’ 중인데 이를 지켜보는 한 유권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40대의 이 남성은 "이제는 섬세한 여성이 정치를 맡아야 나쁜 짓을 하지 않고 깨끗한 정치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여성후보를 지지했다.
’여성 카드’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것은 참신함과 깨끗함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여성 총리 카드’에서 기대했던 것도 도덕적으로 깨끗한 여성을 내세워 부패에 신물난 국민들을 달래보자는 것이었는데, 장 서리가 도덕성에서 흠을 잡혔으니 애석한 일이다.
지난 20세기 이후 여성들은 먼길을 달려왔다. 집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던 여성이 총리 공관 부근을 서성대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신발’, 신발에 묻은 ‘먼지’에 대해서 사회는 여전히 가혹한, 종종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댄다. 여성들의 갈 길은 아직 멀고, 그 길은 ‘깨끗한 신발’ 없이 도달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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