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호박, 셀러리, 당근, 피망, 양파... 평범한 야채들이 그녀의 손을 거치면 화려하고 섬세한 꽃이 된다. 무를 얇게 잘라 백합을 만들고 노란 호박은 데이지로, 빨간 양파는 탐스런 연꽃과 난으로 피어난다. 야채꽃(vegetable flower)의 예술가 명인자씨. 뉴욕 맨해튼의 최고급 호텔 월도프 아스토리아의 전채요리 수석요리사로 25년간 일해온 그녀의 이름은 한인들보다 ‘셰프’들 사이에서 더 유명하다. 닉슨 이후의 모든 미국 대통령이 그녀의 요리를 맛보았고 세계 각국의 귀빈들이 참석하는 파티마다 명씨의 ‘작품’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20여년전 야채꽃이라는 새로운 푸드 장르를 개척해 요리문화를 새로 쓴 명인자씨가 남가주를 방문, 본보 후원으로 LA에서 처음으로 요리강좌를 갖는다. 조용하고 확실하게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명씨의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1,000명의 파티를 준비하려면 야채꽃 센터피스와 오르되브르, 치즈 트레이 장식에만 최소 10시간이 소요됩니다. 오르되브르는 적어도 3,000개, 야채꽃은 30~35개를 만들어야 하지요. 손으로 하는 예술이라 자신이 즐기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작업입니다"
’셰프 남’(Chef Nam)으로 불리는 명인자씨(67)는 지난 20여년동안 미국 최고 명사들의 초호화 파티의 음식장식을 도맡아왔다. 생화보다 멋지고 화려하게 꾸며놓은 야채꽃 센터피스 앞에서 각국의 귀빈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고 정교하게 깎고 다듬어 만든 전채요리 플래터와 카나페, 치즈 트레이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먹어도 되는 건지, 보기만 해야 할지, 조심스럽기 짝이 없게 만들곤 했다.
그렇게 25년간 미국의 전채요리분야에서 최고의 위치를 지켜온 그녀는 그러나 조용하고 자그마한, 아주 평범한 한인여성이었다.
"여자인데다 동양인은 처음이라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런 가운데 나는 힘이 없으니 이 사람들이 못하는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배운 기술만 가지고는 안 되는 세계에서 나만의 솜씨와 아이디어를 개발하려고 계속 노력했습니다"
’작은 거인’ 명인자씨의 조용한 투지는 젊은 시절부터 엿보인다.
고교졸업후 19세에 결혼, 아이 셋 낳고 평범한 주부로 살고 있던 그녀는 어느날 직업군인이던 남편이 "앞으로 아이들을 잘 교육시키려면 부부중 한사람은 대학을 나와야겠다"며 대학입학을 권유하는 바람에 집밖으로 나왔다. 그때가 27세. 어려운 입시공부를 마쳤으나 가정주부를 받아주는 대학이 없어 중앙대학 총장에게 호소해 겨우 가정과에 입학했다.
아이 있는 가정주부가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가능하지도 않았지만 너무나 별난 일이라 그녀는 부끄러워 시장바구니 속에 책을 숨겨 갖고 다녔다고 한다. 이웃들에게 소문 날까봐 몰래 다닌 것은 물론 학교에서도 남학생들이 어찌나 수군대고 흉을 보는지, 특히 막내를 임신했던 3학년부터 졸업 무렵까지는 부른 배를 감추고 공부하느라 정말 힘들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학비를 대주며 격려하는 남편에게 떠밀려, 집에서는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엄마만 기다리는 모습을 뒤로 한 채 열심히 공부했고 31세에 졸업했다. 졸업후 세브란스 병원에서 영양사로 잠시 일하던 그녀는 남편의 제대와 함께 70년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했다.
그녀의 가족은 잠시 오클라호마에서 살았으나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져 뉴욕으로 이주했고 일자리를 찾던 그녀는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주방에 자리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찾아갔다. 각국의 대통령과 귀빈들이 묵어가는 그 호텔이 어떤 곳인지도 몰랐다는 그녀는 영어도 못하고 요리 경력이 전무해 인터뷰에서 떨어졌으나 계속 찾아다니며 졸라대 결국 동양여자로서는 최초로 월도프 아스토리아 주방의 헬퍼로 채용됐다.
그 때가 38세이던 73년.
세계 각국의 내노라하는 셰프들이 모여 있는 호텔의 주방은 요리사만 150명, 텃세도 심했고 구박도 많았다. 처음에는 양파 깎기 같은 궂은 일만 시켰지만 밑바닥에서부터 열심히, 성실히 일하는 그녀의 태도는 금방 눈에 띄었고 1년이 지나자 호텔측은 그녀를 요리학교에 보내주었다. 오르되브르, 즉 전채요리(Hors D’Oevres) 쿠킹 코스를 마치고 정식 쿡이 된 그녀는 다시 2~3년후 유명한 요리학교인 CIA의 서머 프로그램을 이수했으며 그 몇 년만에 월도프 아스토리아의 전채요리부 수석요리사가 되는 입지전적 스토리의 주인공이 됐다.
"여자이며 동양인이라는 이중의 핸디캡을 안고 일하면서 가만히 보니 서양사람들은 손재주가 별로 없어요. 그런 면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낸 것이 정교한 야채꽃이었습니다"
야채꽃은 쿠키 커터를 처음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밀가루 반죽을 도려내 모양을 내는 쿠키 커터로 야채를 잘라보니 여러 모양이 나오기 시작했다. 워낙 야채가 많이 쌓여있는 주방이라 일하면서 계속 이런저런 모양으로 자르면서 섬세하고 특이한 야채 장식을 만들었고 호텔에서는 그녀가 만든 것을 파티에 내놓기 시작했다.
꽃처럼 아름답지만 꽃과 달리 먹을 수 있는 야채꽃은 그때부터 미국 상류층 파티에서 유행하기 시작했고 워낙 미적 감각이 뛰어났던 그녀는 야채꽃 연구를 거듭해 76년부터 10년 연속 ‘뉴욕 호텔, 모텔, 레스토랑 쇼’에서 전채요리부문 1등상을 수상했다.
"아직도 배우는게 많아요. 좀더 새로운 것, 좀더 멋있는 걸 해야지 전에 했던 작품을 또 하면 안되죠. 요즘은 요리 각 분야에서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기 때문에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밀려납니다"
거의 30년동안 칼을 써왔지만 아직도 잠깐 딴청하면 손을 베인다는 그녀는 틈만 나면 야채시장을 돌아다니고, 야채만 보면 꽃으로 만들 생각에 몰두한다. 새로 나온 야채가 있으면 이렇게도 잘라보고 저렇게도 깎아보는 것이 중요한 작업과정. 손으로 하는 예술이라 손이 굳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그녀는 늘 분주하게 움직인다.
또 야채꽃은 도구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과일과 야채를 깍는 각종 카빙 나이프와 그릇들에도 정성을 기울인다. 거라지 세일과 앤틱 샵을 다니면서 특이하게 생긴 그릇이나 쟁반이 나오면 무조건 사다놓고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마다 활용하곤 한다.
명인자씨는 3년전 활동무대를 워싱턴 DC로 옮겨 현재 국제무역센터(International Trade Center)와 USA투데이 가네트빌딩에서 파티 장식부문 수석요리사로 활약하고 있다. 국제무역센터는 워싱턴 중앙에 위치한 정치중심가로 늘 최고 호화파티가 열리는 곳. 여기서 그녀는 근 30년간 쌓아온 실력의 진수를 남김없이 발휘하며 갈수록 경지에 오르는 야채예술작품을 창조하고 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도 자신의 분야에서 일인자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명씨는 앞으로 시간을 내어 하고 싶은 일이 최신 요리책의 출간. 93년에 쓴 야채꽃 요리법(Art of Garnishing)과 96년에 출간한 전채요리책(The Book of Hors d’Oeuvres and Canapes)이 아직도 반스 앤 노블스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지만 새로운 작품과 기법을 담은 최신작을 남기고 싶은 것. 요리책을 내는 것은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쉽지 않지만 후배들을 위해, 또 보다 아름답고 다양한 음식문화의 발전을 위해 조만간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숙희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