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학을 맞아 집에서 딩굴딩굴 놀고 있는 큰 아이를 보자니 어쩐지 측은하게 느껴진다. 여기는 사방에 놀이터 딸린 공원도 많고 방학중에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많지만 그 모두가 다 엄마가 차에 태워 데리고 나가야나 갈 수 있는 곳이지 우리 어릴적 엄마가 없어도 신발만 꿰고는 달려나가서 어둑해질 때까지 놀던 한국의 놀이터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항상 시간이 빠듯하게 움직이는 엄마의 딸인 나의 아이로서는 그나마도 매일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그것이 어디 내 아이만의 문제일까. 내가 자랄 때보다 모든 것이 더 넉넉한 듯 하면서도 어딘지 밋밋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을 보자니 내가 보냈던 유년기가 떠오른다.
서울에서 나고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살았던 한국에서의 나의 삶을 통 털어서, 유치원을 다니다말고 내려가서 살다 온 물골안에서의 삼년은 고향이라는 낱말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내 유년시절 추억이 가득찬 곳이다.
경기도 마석 근처에 자리한 물골안은 이름 그대로 물이 골짜기마다 흔하고 산세가 정다운 시골이었다. 서울에서 살다 간 나를 서울뜨기라고 졸졸 따라다니며 놀리던 동네아이 향순이와 친구가 되어, 초등학교 이학년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의 몇년을, 산등성이의 안개가 겉이던 아침부터 도랑의 물소리가 엄청 커지던 저녁사이를 온 들판을 같이 헤매고 다니며 지치도록 놀면서 나는 내 유년의 나날을 남부럽지 않은 고향의 추억으로 가득 채웠다.
어머니가 가마솥에다 물도 끓이고 찐빵도 쪄주시던 시골생활을 생각하면 어느덧 내 코에는 소나무 장작이 탁탁 타면서 만들던 연기 냄새, 봄에 아지랑이 올라오던 훈훈하고 달큰한 봄풀 냄새, 소여물을 쑬 때 나던 구수한 통보리 익는 수증기 냄새가 가득히 와서 감긴다. 일전에 읽었던 박완서님의 자전적 수필집에서 고향의 재래식 화장실에 관한 묘사를 읽노라니 가마니를 쳐서 만들었던 뒷간의 잿더미 냄새가 기억이 났었다.
실컷 놀고 새까맣게 타서 집으로 가면 저녁을 하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시던 어머니는 발로 하도 밟아서 단단하던 부엌의 흙바닥 위에서 부지깽이로 글씨를 쓰며 내게 한글을 가르쳐 주셨다. 서울에서는 바쁘셔서 한밤중에야 겨우 자다깨서 뵙던 아버지가 거기서는 내게 수영도 가르쳐 주시고 이른 봄 산에 나무하러 가실 때 데리고 가셔서는 진달래도 따서 먹여주시곤 하셨다. 어느 겨울 얻어다 기른 조그만 밤색 강아지가 죽자 눈 덮인 논길을 걸어 묻으러 가며 아버지도 나도 동생도 울던 기억은 냉정하게만 보이시는 우리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으로 기억이 된다.
한번은 별도 없던 새까만 밤에 얼음 덮인 길을 아버지와 걷고 있었다. 전혀 앞이 안보이던 무서운 어둠속에서 아버지와 나는 어른 키로 한길도 훨씬 더 되던 둑 위에서 미끄러져 자갈밭 위로 떨어졌다. 아찔한 다음 순간 나는 아버지의 배 위에 어리벙벙해서 엎어져 있었고 아버지는 놀랬을 나를 달래느라 감싸 안고는 괜찮다를 연발하셨다. 말짱한 몸으로 털고 일어나 다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더듬더듬 걸으며 나는 어둠이 무섭지도 않았고 거의 행복하기까지 했었다.
물골안에서 얻은 그 기억들은 훗날 부모님이 본이 아니게 만드신 어려운 환경으로 내가 마음이 아플 때나 다른 일로 힘이 들 때마다 다시 힘을 내고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다. 내게는 그리운 그 곳이 사업과 건강이 여의치 않아 시골을 찾았을 아버지와 서른도 안된 젊은 서울색시였던 어머니에게는 어떤 생활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문득 느끼게 되는 것은 내가 가장 행복하게 느꼈고 기억하는 시절이 부모님께는 어려웠던 나날들이었을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결국 자식의 마음에 남은 것은 어려웠던 환경이 아니라 그분들의 나를 위한 시간과 마음이었다.
풍요가 지나쳐서 문제가 생기는 요즈음, 이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문득 문득 자문해보는 것은 과연 나는 내 아이들의 마음속에 언제라도 돌이켜보고 돌아설 수 있는 기억을 만들어 주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번 방학에 특별한 것이 아니더라도 훗날 아이가 꺼내 보고 힘을 얻을 수 있는 따듯한 추억이 생기기를 바란다. 오늘 점심엔 아이가 좋아하는 칼국수를 끓여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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