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들 몇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민 초기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처음 미국에 와서 가장 곤란을 겪는 것은 언어문제. 특히 유학생들의 경우는 수업시간에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나와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안 들리는 영어를 듣느라 신경을 집중하다 보면 몇시간 안돼 탈진상태가 된다. 그래서 유학 초기에는 강의실에 녹음기를 들고 들어가 강의 전체를 녹음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 주부가 남편의 그런 유학시절을 회상했다.
“원베드룸에서 남편이 녹음기를 틀고 또 틀며 공부를 하면, 나는 방해가 될까봐 숨도 크게 못 쉬며 지냈어요. 그런데 아파트 옆집에서는 밤이고 낮이고 신나는 라틴 음악이 흘러나오는 거예요. ‘저렇게 즐겁게 사는 방법도 있는데…’생각을 하면 남편이 참 불쌍하더군요”
대부분 한인들이 그렇듯이 그런 노력 덕분에 그의 남편은 지금 자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전문직 종사자로 일하고 있다.
그러면 당시 옆집에 살던 타인종 이웃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것 없는 저임금 근로자로, 하지만 여전히 신나는 음악 속에 살고 있을 지 모르겠다.
“그때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편은 마음놓고 한번 쉬어보지를 못했어요. 얼굴이 훤하게 피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삭았지요”
한푼 벌면 한푼 쓰고, 두푼 벌면 즐겁게 두푼 쓰며, 순간순간을 최대한 즐기는 그 민족의 삶의 방식을 “무조건 한심하다고만 할게 아니다”고 그는 말했다.
그들의 삶은, 문장으로 치면, 오락성 주간지에 나오는 가벼운 문장이라고 할수 있겠다. 부담 없는 내용에 짧은 문장, 게다가 쉼표가 자주 나와서 읽기에 전혀 힘이 안 든다. 반면 목표를 향해 악착같이 달려가는 한인들의 삶은 학술지의 묵직한 문장쯤에 해당될까? 딱딱한 내용에 한 문장이 몇줄씩 계속되고, 중간에 쉼표 하나 없으니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
얼마전 인터넷에서 부호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다. 어느날 부호들이 모여서 자기 자랑을 했다. 먼저 물음표(?)의 주장 - “모든 지식은 물음에서 시작되는 법. 그러니 나를 잘 안쓰는 사람은 잘 될 수가 없지”
다음은 느낌표(!) - “느낌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적막할까. 나를 많이 쓰는 사람일수록 생동감 있는 삶을 사는 거야”
이번엔 마침표(.)가 나섰다 - “세상 모든 것에 마침이 없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겠어. 나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부호이지”
마지막으로 쉼표(,)가 말했다 - “현대인의 불행은 나를 몰라봐서 생기는 거야. 달려가기만 하고 쉼이 없으니 인생에서 중요한 걸 놓치게 되지”
그러자 심판관으로 가만히 듣고 있던 말없음표(…)가 쉼표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쉼표는 생각의 흐름 또는 문장의 구조를 가볍게 끊어줌으로써 뜻을 더 분명히 하는 역할을 한다. 잠시의 공백으로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쉼표의 효과는 음악에서도 중요하다. LA의 성악가 노형건씨는 “잘 쉴 줄 아는 사람이 정말 음악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지휘를 하면서 보면 대개 음표에만 신경을 쓰고 쉼표에 소홀해요. 쉼표를 숨표 정도로 이해하는 겁니다. 쉼표는 숨조차 안 쉬고 가만히 있는 것이지요. 그래야 다음에 나오는 음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데 쉼표를 안 지키면 음악이 기본부터 흔들립니다”
일년이라는 ‘문장’이 어느덧 중반에 접어들며 쉼표를 찍는 계절, 휴가철이 되었다. 지난해 9.11 테러사태 이후 따뜻한 관계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깊어지면서, 올 여름에는 가족·친지들이 함께 하는 휴가여행이 더 활발할 것으로 여행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쉼에 유난히 인색한 우리 한인들도 올 여름에는 확실한 쉼표를 찍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 쉼의 장소에서, 나는 이제까지 내 인생으로 어떤 문장을 써왔는지 한번 돌아보자. 쉼표도 없고, 띄어쓰기조차 없는 문장은 혹시 아니었을까. 쉼표를 잘 찍는 인생에는 느낌표도, 물음표도 잘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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