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노예 출신으로 루이지애나 크리올 문화의 어머니
44세 이후 미국서 가장 부유한 해방 노예 가문 일궈
루이지애나주 내키터시에 자리잡은 멜로즈 농장은 흑인 노예제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노예 출신 흑인 여성에 의해 세워졌다는 특이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남부지역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냈지만 정작 그 주인공에 대해선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마리 테레즈 코엥코엥의 삶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 노예제를 다른 각도에서 볼 기회를 제공해 준다.
루이지애나에 끌려온 아프리카 노예의 둘째 딸로 태어난 코엥코엥은 1767년, 식민지를 찾아온 프랑스 남자 클로드 토마스 피에르 메투아예의 눈에 띄었을 때 25세였다. 메투아예보다 두 살 연상이었고, 이미 4명의 아이를 둔 엄마였지만 메투아예는 그녀의 미모에 매혹된 나머지 그녀의 주인과 협상을 통해 당시 교회와 정치적 비난에 상관치 않고 19년 동안 그녀와 함께 살았다. 둘 사이에 10명의 자녀가 태어났고, 메투아예는 결국 68에이커의 땅과 자유를 선물했다. 그녀가 44세 때의 일이다.
그때까지 코엥코엥은 북미에서도 가장 노예제도가 엄격했던 루이지애나에서 평생 가정부 노예로 일했다. 하지만 이제 자유의 몸이 되자 자신의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곰 사냥을 했고, 인디고와 담배를 재배했다. 식민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1792년 300개의 곰 가죽과 2배럴의 곰 기름, 그리고 9,900개의 담배를 루이지애나로 선적했을 만큼 억척같이 일을 했다.
그렇게 일하면서 그녀는 메투아예와 만나기 전에 낳은 2남2녀의 흑인을 시작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사들여 노예로부터 해방시켰다. 거기에다 땅과 16명의 노예를 사서 그들과 나란히 밭에서 일했다. 1817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할 즈음 그녀와 자녀들은 모두 1만2,000에이커에 달하는 경작지를 지녔고 최소한 99명의 노예를 거느렸다. 그들은 아직도 남아있는 자신들만의 가톨릭 교회도 지었는데 이곳에선 백인들이 뒷좌석에 앉아야 했다.
코엥코엥의 자손들은 이렇게 해서 미국에서 가장 부자인 해방 노예의 가문이 되었다. 그리고 루이지애나에 프랑스어를 쓰는 자유로운 흑인들만의 독특한 크레올 문화를 탄생시켰다. 아름다운 멜로즈 플랜테이션은 그들이 남긴 하나의 기념비이며 코엥코엥의 아들은 이곳에 대저택을 짓는데 30년을 투자했다.
하지만 마리 테레즈 코엥코엥이 남긴 엄청난 부보다도 훨씬 더 의미 있는 것은 어떠한 역경 앞에서도 무제한의 가능성을 찾아낸 그녀의 삶과 태도이다.
"매우 미국적인 이야기"라고 엘리자베스 쇼운 밀스는 말한다. 그녀는 죽은 남편 게리 밀스가 1977년에 쓴, ‘잊혀진 사람들’(The Forgotten People, LSU Press)의 비공식 공동저자이다. 이 책은 코엥코엥과 그녀의 후손들에 대한 연구의 결정판으로 인정받고 있다. 밀스는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노예제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들과 맞아떨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유한다는 노예제도의 본질은 노예제가 시작된 선사시대부터 변함이 없지만 그 소유권의 실상은 농장마다. 지역마다. 세대마다 달랐다고 메릴랜드 대학에서 노예제도를 연구하는 역사가 아이라 벌린은 밝히고 있다.
메트와예를 만나기 전의 코엥코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자유의 몸이 된 1786년 자신의 땅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담배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노예로서 산 44년의 세월과 14명의 자식들이 유일한 밑천인 그녀에게 쉬운 일이란 하나도 없었을 터이지만 담배 경작은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1762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이양 받은 스페인은 아바나 시가에 쓰이는 루이지애나 터바코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관리를 했다. 재배에서부터 건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엄청난 노동량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코엥코엥은 혼자가 아니었다. 메투아예가 그녀에게 매년 120달러의 연금을 보장했다.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3년 분을 고스란히 모아 첫딸에게 자유를 사주었다. 27세의 절름발이 딸은 밭에서 그녀의 일을 도왔고, 농장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코엥코엥은 1793년 스페인 식민정부에 추가 토지를 청원, 500에이커를 받았다.
이후 10년 동안 그녀는 연금을 포기하는 대신 메투아예로부터 아이들을 하나씩 모두 해방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같은 일들은 모두 노예제의 허점을 활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노예제가 말랑말랑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준다. 심지어 해방되기 전에도 코엥코엥과 그녀의 후손들은 노예제의 희생자로 살지 않았다.
그녀의 차남은 땅을 소유할 수 없는 노예신분으로도 912에이커의 땅을 샀고 메투아예와의 사이에 낳은 네 번째 아들인 피에르 역시 자유인이 되기 4년 전에 비슷한 증여를 받았다. 막내딸인 마리 테레즈 메투아예는 아버지가 죽은 1815년에야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그 전에 이미 두 명의 남자 노예를 사서 소유했다.
코엥코엥은 인근 지역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노예들을 대했지만 자신의 땅에서 태어난 모든 노예 아이들이 가톨릭 신자로 성장하도록 하는데는 철저했다. 체벌은 가하지 않았지만 품행이 좋지 않으면 자신의 땅에 세운 소위 ‘감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이 감옥은 미국 내에 유일하게 아프리카 원주민이 세운 건축물이다.
코엥코엥의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들은 그녀의 사진이나 그림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가장 안타까워한다. 전설적인 아름다움과 지성, 강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녀는 어떻게 생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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