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인사회 낮과 밤
▶ 연창흠 <편집국 부국장>
한인 정신지체인들은 바쁜 이민 가정이 더 이상 삶의 보호장소가 되기 힘들다. 또한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미국에서 주는 특수 교육과 복지의 혜택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들은 한인사회나 미국사회든 자립된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의 삶이 사실상 어려운 상태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인간의 가치를 회복시키고 적절한 물리적 환경을 제공하여 보다 나은 삶의 질을 경험하도록 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한 것이다. 가정형태의 장애인 생활공동체가 바로 그런 곳이다.
하지만 한인사회에서 이런 시설은 밀알복지홈이 유일하다. 4월 장애인의 달을 맞아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생활 터전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밀알복지홈을 탐방했다<편집자주>
▲ 가족소개.
한인 밀집지역인 플러싱에 위치한 밀알복지홈(142-44 Bayside Ave).
밀알복지홈은 정신지체 한인 장애인들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가정형태의 장애인 생활공동체이다.
이곳에는 현재 가정에서 돌보기 어렵고 미국 수용기관의 적응이 힘든 한인 장애인들이 입주,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장애인을 둔 한인부모들이 안심하고 자녀를 맡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인 장애인들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립의 기틀을 다져 독립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운영되는 밀알복지홈. 이곳에서 거주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식구는 뉴욕밀알선교단 최병인(44) 단장, 부인인 밀알복지홈 최자송(41) 디렉터와 그들의 자녀인 주영(6)·주희(5) 남매.
장애로 인해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 식구 가운데는 윤미자(41)씨가 최고참. 97년 5월 시작된 밀알복지홈의 3년 차인 그는 정신지체 장애와 당뇨병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에는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백내장의 눈 수술 때문에 병원을 무려 80여 차례 다녀야 했다. 그림그리기와 색칠하기 취미를 갖고 있는 그는 설거지 등 집안 일을 도와주고 있고, 빨래 널고, 개는 일 등 정리정돈이 수준급이다.
4년 차인 예쁜이 제니퍼 이(26)는 정신지체 가운데 학습장애.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해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이성에 대한 관심이 너무 강해 사람을 귀찮게 하던 그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책읽기가 취미인 그는 최근 2년 동안 성경을 무려 7독 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것. 복지홈에서 청소, 우체국 심부름, 장보기 등이 그가 즐겨 하는 일.
정신지체와 야맹증, 약시로 밤길 다니기가 힘든 유명희(36)씨도 4년 차. 차분한 성격 때문에 아이들을 잘 돌봐주고 설거지와 청소에도 솔선수범이다. 그는 청소 중에서도 물 청소에 베테랑이다. 지난 1월 어머니가 사망한 뒤 공동체 생활을 통해 슬픔을 극복하고 있다.
정신지체와 자폐증을 앓고 있는 4년 차 김희숙(25)씨는 듣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통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자립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세수, 양치질, 머리 빗기, 밥 먹기 등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최자송 디렉터가 도와줘야 한다.
예쁜 얼굴과 빼어난 몸매로 자매들의 부러움을 사고있는 그는 한 곳만 계속 꼬집는 자기학대가 심하다. 하지만 복지홈의 모든 신발이 항상 있던 그 자리에 정리되는 것은 바로 희숙씨 덕분이다. 그는 ‘정리정돈’을 잘하지만 두서가 없기 때문에 때로는 중요한 서류를 아무 곳에나 처박아 필요할 때 찾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장애로 인해 공동체 생활을 하게된 이들은 매일 병원 가고, 예배드리고, 공부하고, 친교시간을 갖는 공통적인 공동생활을 함께 하면서도 자신들의 특기를 맘껏 발휘하며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밀알복지홈에는 두 명의 간사가 거주 식구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우선, 페이스대학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전공하고 있는 뇌성마비 장애인 김세화(29)씨는 밀알복지홈의 2년 차 간사. 지난해 간사로 부임한 그는 장애인의 입장을 누구 보다 잘 이해하는 교사, 책임자의 입장에서 장애자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있다. 동갑내기로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있는 이향희(29)씨의 컴퓨터 그래픽 개인지도도 바로 김 간사의 몫.
지난해 5월 부임한 이기원(23) 간사도 있다. 그는 주로 사무실 업무를 하면서 장애 아동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교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밀알복지홈에는 거주하는 식구 뿐 아니라 매일 정기적으로 오거나 또는 비정기적으로 오는 식구들도 여럿 있다.
1994년 밀알과 첫 인연을 맺고 밀알복지홈 초창기 가족인 차형옥(33)씨는 현재 암이 재발,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 정신지체를 앓으면서도 온유하고 상냥하면서 마음이 유난히 착했던 그는 4년 전 급성유방암 선고를 받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왼쪽 유방암 제거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건강하게 지내왔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가슴 통증을 느낀 그가 병원을 찾아 검진을 받은 결과 유방암이 재발됐다는 선고를 받았다. 이미 다른 곳까지 전이돼 수술도 불가능하고 암 치료 처방약도 효과가 없다고 의사는 통보했다. 결국 항암 치료만 남아있는 상태지만 그도 그리 쉽지 않다. 그는 불법체류 신분이라 메디케이드 보험혜택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봉제공장에 다니던 홀어머니도 그의 치료 때문에 현재는 직장도 못나가고 있는 형편이다. 말은 잘하지만 학습능력과 사고력이 없는 그는 암 선고를 받은 뒤에도 그같은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복지홈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환한 표정을 짓는다.
매일매일 복지홈에 오는 박은정(20)씨는 정신지체 장애. 그는 인형을 무척 좋아하며 그림그리기를 즐긴다. 성격이 워낙 깔끔해 하루에도 몇 번씩 손을 씻는 버릇이 있다.
성격이 내성적이라 미국 사람을 무서워하고 한인들하고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 맞벌이하는 부모가 집에 혼자 둘 수 없어 복지홈에 오는 그는 오늘도 자신이 즐겨 먹는 빵을 먹으며 실물크기의 아기 만한 인형을 갖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있다.
이외에도 복지홈에 자주 들르는 장애인으로는 농구를 잘하고, 성격이 차분하고 자매들에게 매우 잘하다가도 화나면 겁날 정도로 무섭고 고집이 센 백일종(34)씨, 뇌성마비로 현재는 왼쪽 귀가 잘 안 들려 보청기가 필요한 양철승(41)씨, 동서양의 문화차이에서 오는 충격으로 정신지체 장애를 앓지만 직업재활을 하면서 청소와 정리정돈을 잘하는 이재연(25)씨 그리고 한때 세븐일레븐에서 일하다 현재는 직업을 구하고 있는 뇌성마비 장애인 장상준(40)씨 등이 있다.
정비소에서 자동차 정비를 배우고 싶다는 장씨는 성실하며 복지홈에 오면 정원청소를 하고 보조 교사로 장애 아동들을 가르치곤 한다.
▲ 프로그램
지시나 약간의 도움으로 신변처리 가사일 사회 편익시설 이용이 가능한 한인 장애인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복지홈의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으로는 이 닦기, 세수, 머리감기, 목욕, 속옷 갈아입기, 손발톱 깎기 등 개인 위생 관리를 위한 것이 있다. 또한 주로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처리로 세탁기나 가스사용 등 청소나 정리의 부분이 주를 이루는 가정생활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다.
이외에도 음악듣기 등 여가선용을 위한 프로그램과 일반적인 예절, 공공시설 이용, 교통수단 이용, 보행 예절 등 사회적응을 위한 프로그램 등이 실시되고 있다.
특히, 밀알복지홈에서는 한인 장애인들을 위한 사랑의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사랑의 교실은 장애아동을 대상으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회 실시되는 방과후교실과 토요일 프로그램으로 되어 있다. 현재 방과후교실에는 7명의 교사가 13명의 학생을, 토요 사랑의 교실에는 9명의 교사가 14명의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다.
밀알선교단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사랑의 교실의 학생들 장애형태는 뇌성마비, 자폐아, 정신지체, 정서장애아들로 연령층은 10세에서 19세 정도. 찬양과 율동 그리고 학습의 형태로 엮어지는 사랑의 교실은 특수교육이 병행되고 있다.
한편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는 밀알복지홈은 재정적 어려움으로 더 많은 장애인들을 위한 보다 다양하고 전문적인 프로그램 확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한인 장애인들의 보다 나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전문적인 인력 충원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 이를 위한 한인사회 차원에서의 지원이 절실한 실정이다.
▲ 결론
한인 장애인들에게 보다 나은 삶의 질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장애인 자녀를 둔 한인 부모들의 인식변화가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국은 정부와 지역사회, 병원, 가정 등이 장애아동을 돌보는 역할을 각각 분담하고 있다. 하지만 흔히 한인사회에서는 장애아동의 모든 책임이 어머니의 몫으로 돌아간다.
물론, 점차 장애 아동 문제를 부부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경우가 늘고는 있지만 아직도 한인가정 대부분은 어머니가 책임지고 있다고 관계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특히 한인가정 대부분은 자녀의 장애를 공개하는 것을 무척 꺼리고 있기 때문에 장애 아동들이 비장애인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
이에 따라 장애인 자녀를 둔 한인가정은 무조건 숨기기보다는 보다 나은 자녀의 삶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인사회 차원에서는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가정형태의 장애인 생활공동체가 많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밀알복지홈 최자송 디렉터는 "한인가정 대부분은 장애자녀의 문제를 무조건 부모의 탓으로만 돌리거나, 비장애 형제자매의 생활에 걸림돌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로 공개하는 것을 꺼리고있는 실정"이라며 "장애 자녀들이 정신이나 신체적으로는 불편하지만 비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랑을 느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부모들이 장애자녀의 인격체를 인정하고 비장애인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을 개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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