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커리어. 여성에게 있어 이 두 개의 선은 양립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평행선이다. 수퍼우먼이 되지 않는 한, 하나에 우선권을 두거나, 두개 다 적당히 하거나, 아니면 둘 중 하나만 하거나... "아이들 키워놓고 하지"는 말이 쉽지 훌쩍 흘러가버린 시간은 중년의 여성에게 과거 커리어와의 불연속선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이들 키워놓고’ 돌아온 여성이 있다. 피아니스트 길미향씨. ‘키워놓은’ 정도가 아니라 아들 딸 모두 자기 못지 않은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만들어놓은 그녀는 아이들이 여러차례 협연했던 페닌슐라 심포니의 35주년 기념공연에 초청돼 오는 4월14일, 10년만의 협연무대에 오른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연주자에게 10년 공백이란 메우기 힘든 엄청난 갭.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 테크닉의 연마가 필요한 예술가가 하루이틀, 한두달, 일이년도 아니고 10년을 손놓고 있다가 다시 무대에 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음악가들의 이야기다. 피아니스트 길미향씨의 ‘이젠 내 차례’- 엄마 일 마치고 자신의 커리어를 다시 찾은 한 여성의 쉽지 않았던 여정을 들어본다.
길미향씨(48)는 10년전만 해도 한인 커뮤니티에서 낯익은 얼굴이었다. 첼리스트 이방은씨, 바이얼리니스트 김용제씨와 ‘나성트리오’의 단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나성 심포니,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 라미라다 심포니등 여러 오케스트라와 일년에 몇차례씩 협연을 가졌던 활발한 피아니스트였다.
무대에서 수려하고 감미로운 연주로 갈채받던 그녀가 연주자의 커리어를 접은 것은 10년전. 지금 11학년인 작은 딸 예은이가 1학년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엄마 손이 많이 가기 시작할 때라 애들부터 키우자고 결심했습니다. 애들 키워놓고 다시 연주생활을 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가능하리라고는 사실 기대하지 않았어요. 피아니스트가 손을 놓는다는건 곧 연주생활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죠"
그녀 자신이 연습하던 시간에 아이들 피아노 연습을 시키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아이당 두세시간씩 꼬박 붙어 앉아 연습을 시켰다. 물론 어린 아이들이 두시간동안이나 연습할 리는 만무. 그 시간은 주로 엄마와 얘기하고, 놀기도 하고, 피아노 장난도 하는 시간이었다. 그 다음엔 숙제를 봐주고, 저녁식사 준비하고, 또 틈틈이 10여명의 피아노 개인교습을 계속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학교에서도 요구가 늘어나 교내 합창단 반주는 도맡아 놓고 했다. 예은이 중학교와 아들 철은이 고등학교의 두군데 합창단 반주를 8년이나 계속했는데 그 시절의 화요일엔 하루에 네 번씩 학교를 오가기도 했다.
아이들도 피아니스트로 만들 생각은 아니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잘 치는 아이들을 말릴 이유는 없었다. 큰 아이는 경연대회마다 줄줄이 입상해 오케스트라 협연 경력이 15회에 이르렀고, 오빠에 밀려 아무래도 신경을 덜 썼는데도 더 재능을 보인 작은 아이는 지금까지 20회나 협연 경력을 자랑한다.
그 때문일까? 과거의 화려한 연주생활이 그리웠을 법도 한데 길씨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손을 내젓는다. "아이들이 일년에 몇 번씩 외국대회에 나가고 협연을 하니 연습시키고 그 리허설과 대회만 쫒아다녀도 내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어요. 어쩌면 아이들 뒷바라지하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는지도 모르지요"
살림하고, 아이들 키우고, 남편 내조하고, 학생들 가르치고, 1인 3역, 4역하며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철은이가 줄리어드 진학을 심각하게 고민하다 하버드로 진학했고 예은이도 내년이면 대학에 갈 16세 소녀로 성장했다.
예은이까지 가고 나면 자신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해온 길씨는 지난 해 가족들에게 자신의 꿈을 알리고 이를 위해 모두 기도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무렵이던 작년 가을 전혀 예기치 않던 협연제의가 들어왔다. 페닌슐라 심포니가 제35회 시즌에 길미향씨를 초청한 것.
"처음엔 아이들과 협연하자는 얘긴줄 알았어요. 아이들이 몇 번씩 협연했던 곳이고, 오케스트라가 현재 활동하지 않는 사람을 협연자로 쓰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이죠"
알고보니 페닌슐라 심포니의 지휘자 조셉 발렌티는 오래전 예은이의 오디션때 길미향씨가 MTAC 교사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듣고 언젠가 솔로이스트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는 것. 그때 예은이는 1등을 했고 길씨가 그 어머니라는 사실도 알게된 발렌티는 더욱 호감을 갖게돼 이번에 특별히 초청한 것이다.
"기적과 같은 일이고 또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자신 없었지만 모두들 해보라고 격려해주어 용기를 냈습니다. 이제 때가 된 것 같네요"
4월14일 오후 7시 팔로스버디스의 롤링힐스 코버넌트 처치 오디토리엄(2222 Palos Verdes Drive North in Rolling Hills Estate)에서 연주할 협주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콘첼토 20번 D 마이너. 모차르트 곡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는 처음이라 더 신경이 쓰인다는 길씨는 "콘첼토 D 마이너는 피아노가 돋보이는 애절하고 예쁜 곡이지만 연주자들에게는 아주 어려운 곡"이라고 설명하고 요즘 하루 4~5시간씩 연습에 몰두한다고 전했다.
"여성들이 잃었던 자기 커리어로 돌아오는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남편의 지원과 격려입니다. 협연 초청을 받고도 자신이 없어 중간에 몇 번 그만 두려고 했죠. 그때마다 남편이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며 적극 밀어주었어요. 요즘은 연습할 때 옆에 앉아 매일 한번씩 들어주고 코멘트 해줍니다. 듣는 귀가 보통이 넘거든요"
이제 새로 시작이다. 예술이 끝이 없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자라날 뿐,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연주하겠다는 길미향씨는 언젠가 아들, 딸과 함께 ‘투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은 소박한 꿈외에 거창한 계획은 세우지 않기로 했다며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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