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문화는 형식을 극히 존중하는 문화다. 그러므로 유교적 개념에서는 전쟁이란 말은 상황과 명분에 따라 달리 쓰인다. 이웃 나라의 군주가 패륜적 행위를 일삼아 이를 무력으로 응징한다. 같은 전쟁 행위지만 이 경우는 ‘주벌’(誅伐)로 불린다. 죄를 물어 친다는 뜻이다.
물론 주벌의 주체가 되는 천자(天子)나 패자(覇者)는 정의의 깃발을 들고나서야 한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양심의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주벌이라는 말에는 그러나 ‘강자의 논리’가 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인의(仁義) 이름으로 문죄(問罪)의 명분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힘이 바로 정의인 게 현실인 까닭이다.
부시의 ‘악의 축’ 발언으로 한국이 온통 난리다. 대통령은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을 보이고 있다. 여권은 ‘부시 행정부는 한국 차기 대통령과 대북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워싱턴포스트지 보도에 보통 화가 난 게 아니다. 마치 대통령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소할 것 같은 태세다.
여권의 반응대로 ‘악의 축’ 발언은 한반도에서 전쟁도 불사한다는 뜻인가. 발언의 저의를 정확히 짚어보기 위해서는 9.11사태의 본질을 되새겨 보는 게 그 순서인 것 같다.
9.11 참사 후 부시가 전쟁을 선포하자 그 전쟁은 바로 냉전으로 비유됐다. 냉전은 미국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위협하는 공산체제와의 전쟁이었음은 다 아는 사실. 따라서 냉전은 특정 국가나 국민을 상대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었다. 체제(regime) 그 자체와의 전쟁이었다. 자유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 체제의 존재 자체를 말살하는 게 냉전이었다.
부시의 ‘악의 주축’ 발언의 핵심 포인트는 바로 이 점에 있다. 말하자면 9.11은 미국과 문명세계에 위협이 되는 ‘악의 축’의 존재를 확연히 깨닫게 해준 사태로 미국은 선제공격을 통해서라도 ‘악의 축’을 이루는 나라들의 대량 살상무기 개발사태를 막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북한·이라크 같은 체제는 존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악의 축’ 발언의 부수적 메시지다.
이런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는 부시 독트린은 북한 문제라는 각론에 대해서도 이미 새 전략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매파성 포용’이라는 다소 생경하게 들리는 이론이 바로 그 것이다.
조지타운대의 빅터 차가 그 창시자로 알려진 이 이론은 북한문제 접근 방식은 근본적으로 포용밖에 없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렇다고 클린턴식의 무조건 포용은 아니다. "포용정책이야말로 장차 북한을 응징할 국제적 연대를 구축하는 가장 실질적 수단"이라는 주장과 함께 "오늘의 당근이 내일의 채찍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 정책은 강조한다.
이는 춘추전국시대 ‘주벌(誅伐)의 논리’를 현대식으로 정립한 것 같다. "패륜적 행위를 일삼는 군주에게 패자는 경고를 보낸다. 패자의 아량을 과시해 일단 기회를 주는 것이다. 2차, 3차 경고도 무시된다. 그러면 그 죄를 묻고 온 천하에 알린다. 그리고 주벌에 나선다. 인의(仁義)의 깃발을 날리며."
현 상황에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패자(覇者)는 미국이다. ‘악의 축’ 국가가 응징 대상이다. 미국적 가치관, 다시 말해 국제 사회의 보편적 가치관을 계속 거부하는 그들에게 수차 경고를 한다… 결국 국제적으로 여론이 형성된다. 타이밍이 무르익은 것이다."
"국민을 기아로 몰아내면서 대량 살상무기 생산에 혈안인 나라다." 부시가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직접 비난한 대목이다. 이 발언이 나온지 두주 후 북한의 참상에 대한 고발이 잇달고 있다.
"100만명 이상이 아사한 북한의 비극은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전체주의적 억압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북한의 강제 수용소에서는 9개월째 임신부도 강제노역에 동원된다. 가까스로 출산한 아기들은 물에 젖은 비닐봉지 등으로 얼굴을 덮어 죽인다. 청진감옥에선 한달에 7∼8명의 아기들이 태어나지만 짐승먹이로 버려진다…."
지난주 도쿄에서 열린 북한 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에서 발표된 내용의 일부분이다. 뉴욕타임스는 도쿄회의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면서 부시의 중국 방문시 탈북자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할 가능성도 보도했다.
이쯤에서 한번 정리 해보자. "부시는 북한을 ‘악의 축’의 일원으로 온 세계에 선포했다. 미언론은 북한정책과 관련해 공공연히 차기 한국 대통령을 운위한다. 동시에 북한주민의 참상을 알리는 회의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부시의 한국 방문이 뒤따른다."
이 일련의 사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북한을 응징할 국제연대를 구축하는 ‘매파의 신 포용정책’이 벌써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햇볕정책은 어떻게 된다는 얘기일까. 한미 정상회담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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