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국과 일본에서는 두 여성장관이 주목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의 1월29일 개각에서 유임됨으로써 현 정권 최고참 장관 기록을 다지게 된 김명자 환경부장관과 같은 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로부터 경질 통보를 받은 다나카 마키코 일본 외상이다. 일본의 명 총리로 꼽히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외동딸로 3선의원 경력의 다나카가 외무성에서 떠밀려나는 모습, ‘몇달 있으면 갈릴 여성장관’이라며 상사 대접도 제대로 안하던 관리들의 냉담한 반응을 딛고 장수에 성공한 김장관의 모습 - 모두가 여성들이 사회에서 지금 발 딛고 서있는 곳은 어디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본보기들이다.
고이즈미 총리당선의 일등공신으로 꼽혔던 다나카 전 외상은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감으로 거론될 만큼 정치적 역량이나 국민적 인기도가 높이 평가되는 정치인이다. 70년대 초반 아버지가 총리직을 수행할 당시 건강이 안 좋은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요정까지 따라 다니며 일본의 정치 내면을 속속들이 배웠다고 한다. 그런 그가 ‘일본 최초의 여성 외상’이라는 화려한 깃발을 들고 들어선 외무성에서 관료들과 호흡을 맞추지 못해 싸움만 계속하다 9개월만에 불명예 퇴진을 했다.
그가 너무 고집이 세고 성격이 강한 것이 원인으로 꼽히는 데 그 지적은 필경 맞는 것일 것이다. 중학교 3학년때 갑자기 ‘미국 유학가겠다’고 선언, 다나카 전 총리도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해 유학을 허락했다는 이야기나 정계 거물들에게 별명을 마구 붙치며 직설적으로 공격한 에피소드등을 종합해 보면 그는 성격이 보통 강한 여성은 아닌 것같다.
그렇기는 해도 지난 몇 개월 ‘돌출 행동’‘튀는 발언’이란 수사를 달고 수시로 보도되던 다나카 관련 뉴스들을 대하면서 “그가 남자였더라도 저런 구설수에 올랐을까”싶은 때가 여러번 있었다. 여성장관이 국회 본회의에 바지를 입고 간것, 의자에 앉아서 신발을 벗고 있었던 것 … 남자라면 문제도 되지 않을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이 다 잡음이 되고 뉴스거리가 되는 한국의 분위기와 같은 맥락이다. 여성이 어느 자리 이상으로 올라서면 현미경을 들이대듯 사방에서 감시의 눈길이 쏠리는 것이 현실인데 그 살얼음판을 김명자 장관은 어떻게 성공적으로 통과해냈는 지에 한국 여성계는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역대 정권을 통틀어 여성이 최장수 장관 기록을 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한국의 동해안을 여행했을 때, 유난히 눈길을 끈 것은 깎아지른 듯한 비탈에 선 나무들이었다. 어려운 생존조건에 맞추느라 이리 휘고 저리 휜 가지들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자리 잡을 때까지 뿌리가 통째로 뽑혀버릴 듯한 역경을 얼마나 견뎌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렸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여성의 사회진출은 비탈에서 뿌리내리기와 흡사하다. 남성들 독무대였던 커리어의 동산에 여성의 입산이 허용되고, 여성의 진출 고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고도가 높을수록, 그래서 진출한 여성동료가 아직 적을수록 여성은 비탈에선 나무와 같다. 조건 좋은 땅에 무리지어 자리잡은 남성 동료들은 서로 바람막이가 돼주고 웬만한 결점은 가려져서 잘 보이지도 않지만, 벼랑에 발붙인 것만도 ‘성공’으로 간주되는 여성 선두주자는 홀로 서있으니 바람이 더 세차고, 일거수 일투족이 더 잘 드러나 보이게 마련이다.
바람 드센 비탈에서 어떻게 하면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김장관의 경우를 보면 우선은 실력이다. 화학교수였던 그는 취임 첫 기자회견에서부터 “실력으로 장관직을 수행하겠다”고 공언할 만큼 환경분야의 전문가이다. 아울러 철저한 실력위주의 인사정책이 관료조직 장악을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비탈의 나무들에게 또 필요한 것은 유연성이다. 다나카 전 외상이 사생결단을 하듯 관료들과 정면대립했던 데 반해 김장관은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부드러움으로 오히려 상대방을 승복시키는 여성적 강점을 자연스럽게 활용했다고 할수 있다.
사회활동을 하는 모든 여성들의 바람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일을 어떻게 하는가 만이 문제가 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 여성들은 지금 발딛고 서있는 곳이 ‘비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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