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 선정됐다고 한다. 조폭에서 시작돼 온갖 게이트로 마감된 게 한국의 2001년. 그러다 보니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말로는 도저히 정리할 수 없어 오리무중이 대표 사자성어로 선정됐다는 보도다.
점입가경(漸入佳境), 설상가상(雪上加霜), 무소불위(無所不爲), 목불인견(目不忍見) 등도 거론됐다고 한다. 그러나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형편과 관련해 대학교수들은 결국 ‘오리무중’을 대표 사자성어로 꼽았다는 것이다.
사자성어가 화제가 되어서 하는 말인데 이런 얘기가 전해진다. ‘오리무중’을 한자로 쓰라는 시험문제를 제출했더니 한 수험생이 ‘汚吏無中’이라고 썼다. ‘五里霧中’이 물론 원하던 정답. 그런데 틀린 답도 아닌 것 같아 시험관은 몹시 고민을 했다고 한다.
풀이하면 ‘썩은 관리는 중용 내지 절제가 없다’는 뜻. 돈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뇌물이라면 일단 무조건 먹고 보는 세태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더 적절한 표현이다 싶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우스개 이야기는 그렇다고 치고, 미국의 언론도 ‘오리무중의 한 해’를 지내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우선 예측부터가 엉망이었다. 내로라 하는 논객들이 포진된 게 미국의 언론이다. 그런데 그 누구도 21세기의 원년 2001년의 화두가 ‘테러’가 되리라는 예측을 하지 못한 것이다.
테러전쟁 발발과 함께 미 언론은 더욱 안개 속을 헤매게 된다. 대부분의 진단과 예측이 빗나가서다. "아프간 전쟁은 제2의 월남전이 될 것이다." "미국의 폭격은 분노만 야기시켜 탈레반 정권에 대한 아프간 국민의 지지만 높인다." 뉴욕타임스, 월스트릿 저널 등의 해설기사다. 그 전망이 틀린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대니얼 쇼어, 모린 다우드, 아더 슐레진저 주니어 등 미국을 대표하는 논객들도 대부분 헛짚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한결같이 비관적 견해를 보였다. 역사학자인 슐레진저는 테러 전쟁을 과거 미국이 월남전 수렁에 빠진 상황과 비교하는 실수로 더욱 유명해졌다.
왜 이들은 이런 진단을 하게 했을까. 이유는 여러 가지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고정관념이 그 하나다. 아프간은 영국도, 구 소련도 정복을 못한 ‘제국주의의 무덤’이란 게 그 고정관념이다.
탈레반 정권이 아프간 국민의 굳건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착각도 그 이유의 하나다. 전략폭격은 효율성이 없다는 종래의 군사적 통념도 오판을 불러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아프간 전쟁은 이슬람권 전체의 분노를 야기시킨다는 모호한 선입관 역시 판단을 그르치게 한 근본적 요인으로 지적된다.
진보계인 네이션지 논평(11월19일자)이 그 대표적 전망이다. ‘아프간 전쟁은 이슬람권 전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켜 미국을 무제한 소모전에 끌어들이고 수천명의 반미 자살특공대를 만드는 결과를 가져 올 뿐이다’-. 네이션지의 결론이다.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요약하면 ‘월남 증후군’(Vietnam syndrome)이 이같은 잘못된 진단에, 비관적 전망을 낳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월남 증후군에서 벗어나지 못한 언론은 필연적으로 패배주의적 진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다.
"위대한 저서는 커다란 죄악이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시인 칼리마큐스의 말로 전해진다. 이 말이 의미하는 건 뭘까. 인간은 선입견에, 편견 투성이. 따라서 아무리 공정하려고 노력하고 박식을 자랑해도 결국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역설로 표현한 것 같다.
사실 사람은 자신이 지닌 언어,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경험 세계를 통해서만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로 해석이 안 되는 사물이나, 현상을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엉뚱한 오해를 가져오기가 십상이다.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진 것 같다. 그렇지만 말하고자 하는 건 다름이 아니다. ‘말이 객관 보도지, 언론 종사자는 필연적으로 편견을 전하는 죄 속에 헤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공연히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토록 좋은 언론 환경을 향유하고 있는 미주류 언론의 내로라 하는 논객들이 그럴진데 ‘하물며…’ 하는 자괴(自愧)의 생각이 들어서다.
각설하고, 오는 2002년의 세모를 정리하는 대표 사자성어는 어떤 게 될까. 밝고 반듯한 뜻을 지닌 사자성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인데 그런 말이 언뜻 생각나지 않는다. 뭐가 좋을까. ‘십리무중’(十里霧中)은 설마 아닐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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