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래하는 대신 붐 박스 들고 행진하는 캐럴
21세기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 실험적인 작곡가 필 클라인(48)이 해마다 할러데이에 하는 콘서트 행진, ‘고요하지 않은 밤’과 같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클라인의 이 전위적인 전자 크리스마스 음악은 일단의 친구들과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진 캐럴꾼들이 들고 그리니치 빌리지의 13개 블럭을 걷는 동안 ‘붐 박스’가 연주한다. 때로는 꿈결처럼 감미롭고, 때로는 시끄럽게 뗑그렁거리는 클라인의 음악은 이 도시 특유의 소음과 잘 뒤섞여 희한한 아름다움을 연출해낸다.
"크리스마스 때의 뉴욕이란 배경이 연극의 무대와 같은 효과를 냅니다. 처음부터 바로 그 무대에서 연주될 것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라는 클라인은 약간의 유보사항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으로 1992년부터 이 ‘고요하지 않은 밤’을 공연해왔다. 해마다 그의 붐 박스 오케스트라와 따라 다니면서 듣는 청중들은 늘어만 갔고 이제 ‘고요하지 않은 밤’은 이 도시의 가장 사랑 받는 비공식 할러데이 전통행사의 하나로 자리잡게 됐다.
지난 토요일 밤에도 100명의 붐 박스 캐럴꾼들이 워싱턴 스퀘어 팍에 모였다. 대부분의 자원 봉사자들이 자기 붐 박스를 가지고 왔지만 안 가지고 온 사람은 클라인이 미리 녹음된 카세트를 끼워서 빌려줬다. 모두 코트와 모자와 스카프로 중무장을 해서 그렇지 할러데이 칵테일 파티에 모인 것 같은 오케스트라는 젊은이부터 노인, 부부, 독신자, 일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어떤 꼬마는 ‘피셔-프라이스’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고 왔고 어떤 남자는 자신의 붐 박스를 색색으로 번쩍이는 크리스마스 라이트로 장식했다.
7시10분에 클라인이 분수 위로 올라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플레이" 소리와 함께 수백개의 작은 종을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공원을 채웠다. 거기서부터 워싱턴 플레이스를 따라 동쪽으로 행진이 시작됐다. 행인들도 마치 결혼식 행렬처럼 천천히 따라왔다. 100개의 붐 박스가 방향을 바꾸면 소리도 방향을 바꿨다.
보는 사람의 반응은 가지가지. 브로드웨이에 가까워갔을 때는 차에 탄 사람들이 입을 크게 벌리고 쳐다봤고 쿠퍼 스퀘어를 지나갈 때쯤엔 음악소리도 커져 자동차 소리를 제압했다.
올해 처음 참가한 맨해튼의 크레딧 분석가 조지 키멀(42)은 교차로마다 교통정리를 담당했다. 그룹이 너무 커서 신호 한번에 다 건널 수가 없었으므로 자신의 붐 박스를 무기처럼 휘두르며 택시 두 대와 다른 차 한 대가 앞길을 막지 못하게 했다.
독일에서 왔다는 악셀이라는 남자는 눈을 감고 지나가는 음악을 듣더니 "행복이죠?"라고 물었다. 바로 그 점이 이 ‘고요하지 않은 밤’의 독특한 점이다. 저마다 바쁘고, 불친절하고, 특히 9월 11일 사태 이후엔 더없이 스트레스 받은 표정인 뉴욕 사람들이 이 ‘고요하지 않은 밤’에서만은 행복하게 미소짓고 낄낄거리며 활보하고 일행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많아져 세인트 마크스 플레이스에 이르렀을 때쯤엔 1000명쯤으로 불어난다.
이 행진에 앞장선 클라인은 오하이오주 애크런에서 자라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80년대 초에 ‘델-비잔틴스’라는 무명이지만 전설적인 펑크 밴드의 일원이기도 했던 그의 현재 생업은 작곡가. TV 광고 음악 등 위촉받은 음악을 작곡하지만 이 ‘고요하지 않은 밤’으로 가장 이름을 떨쳐 올해는 스튜디오에서 녹음해서 음반을 내기도 했다.
탐프킨스 스퀘어 팍에 이르러 음악이 끝날 때쯤엔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 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드디어 기계까지 멈추면 모두들 환호를 지른다. "20파운드짜리 붐 박스를 지고 오느라 허리는 아팠지만 매우 아름답고 기운 나는 경험이었다"고 존 딕슨(31)은 말한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난 빈 공원에서 클라인은 붐 박스의 숫자를 헤아려 차에 싣는다. 올해는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2개가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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