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벨기에의 한 거부가 한국여성과 결혼하고 싶다며, 한국의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신붓감을 구한다는 뉴스가 보도돼 화제가 됐었다. 지금쯤 그가 바라던 대로 ‘동양적 신비로움을 지닌 세련된 한국여성’을 만나 제2의 인생을 구상하고 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보도 당시 수천명의 여성들이 관심을 보였다고 하니 신붓감 고르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71세 부호의 ‘공개 구혼’ 기사를 읽으면서 새삼 깨달아진 것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옆에서 그걸 같이 쓰며 즐길 사람이 없으면 허전하고 뭔가 불안정한 것이 사람이다.
원자는 물질의 기본단위이지만 물질의 고유성질을 가지려면 원자 상태로는 안되고 화학결합을 통해 분자를 이뤄야 한다. 사람도 사람의 특성을 온전히 갖기 위해서는 누군가와의 관계가 필요한 것 같다. 엄마로, 아빠로, 자식으로, 친구로, 배우자로… 얽히고 설킨, 그래서 때로는 숨이 막힐 것 같기도 하지만, 그 관계들이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한다.
연말 연시 할러데이 시즌은 어떤 의미에서 ‘관계의 축제’이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함께 모이고, 선물을 주고받고, 오래 소식을 못 전하던 친지들에게 카드를 보내고, 동창회에 가서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고, 직장 동료들과 망년회를 하는 모든 행위들은 살아오면서 맺은 관계들을 1년에 한번씩 총 점검하고, 같이 축하하며, 돈독히 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연말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확연히 드러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관계의 망이 넓어서 오라는 데 많고 갈 데도 많은 부자와 관계의 가닥이 허약해 카드 몇장 쓰고 나면 끝나는 가난뱅이. 나이 들수록 사람을 부유하게 하는 것은 돈보다는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나이 드신 친지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재미있는 조크를 들었다. ‘- 불문’ 조크의 2탄이었다.
1탄을 먼저 소개하면 "40대는 학벌 불문, 50대는 미모 불문, 60대는 이성 불문"- 40대쯤 되면 일류대학 나오나 3류 대학 나오나 더 이상 별 의미가 없고, 50대 되면 미인이나 못 생긴 아줌마나 거기서 거기, 60대 되면 남성이나 여성이나 별 구분이 없다는 내용이다.
이번에 들은 제2탄은 이렇다. "60대는 빈부 불문, 70대는 건강 불문, 80대는 생사불문"- 60대 되면 돈 있으나 없으나 별로 할 게 없으니 그게 그거, 70대 되면 체력이 쇠해 건강하나 허약하나 거기서 거기이고, 80대는 수명이 다해가니 살아도 살았다고 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젊은 세대가 장난기 섞어 만든 조크라서 나이든 층이 들으면 섭섭한 측면도 있지만 새겨들을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청춘을 바치며 쟁취하려고 애쓰는 학벌, 돈, 건강, 혹은 미모의 애인이 나이 들면 별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학벌이, 미모가, 돈이, 혹은 건강이 더 이상 기를 못 펴는 자리에서 힘을 발휘하며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관계’는 기적을 낳기도 한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교도소는 탈출 불가능한 철의 감옥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그 악명 높은 교도소에서 한 무정부주의자가 탈옥에 성공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가 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탈옥이 가능했던 것은 혁명가로서 활동하며 사귄 동지, 지인들의 목숨을 건 도움 덕분이었다. ‘관계’의 힘이다.
할러데이 시즌이 되면 정신과 의사들이 바쁘다. 모두가 들뜬 분위기 속에서 기대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에게 정신질환이 도지기 때문이다. 따뜻하게 말 건네는 이웃이 하나만 있었으면 의사를 찾지 않아도 되었을 환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시인 김용택씨는 ‘세상의 길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내 가난함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누군가가 배부릅니다//내 야윔으로/세상의 어딘가에서/누군가가 살이 찝니다…”
이 시를 이렇게 바꾸어 읽으면 어떨까. "내 배부름으로/세상의 어딘가에서/누군가가 가난합니다//내 살찜으로/세상의 어딘가에서/누군가가 야위고 있습니다”
하루종일 전화벨 한번 안 울리는 집, 일주일이 지나도 방문객 한 명 없는 집도 주위에는 있다. 우리가 간수해온 관계의 울타리가 혹시 너무 좁은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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