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자 본보 사회면에는 가슴 아픈 사진이 한 장 실려있었다. 백발의 한 할아버지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서있는 모습이었다.
장소는 샌버나디노 형사법정. 어머니와 여동생을 총격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염승철군(17) 재판정이다. 증언대에서 증언을 마치고 막 일어서는 80대의 할아버지는 바로 염군의 외조부였다.
30대 후반의 한창 나이에 무참하게 살해된 딸, 그 딸을 죽인 살인범으로 재판을 받는 외손자, 그리고 외손자를 위해 사위의 난폭성을 증언할 수밖에 없는 그 자신 - 노인의 고통이 얼마나 깊을 지는 제3자로서 상상하기가 어렵다.
지난 99년 6월 발생한 이 사건은 부유한 가정의 15살짜리 소년이 존속살해 범인으로 구속되면서 10대 자녀를 둔 모든 부모들을 가슴철렁하게 했다. 인륜 경시 세태, 물질만능주의, 너무 흔한 총기, 자제력이 부족한 사춘기의 충동성…당시 많은 요인들이 지적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가장 분명하게 느껴지는 사실 한가지는 “아이가 그 부모 밑에서 행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염군은 ‘집안의 장손’이라며 부모가 자신에게 거는 높은 기대, 성적이나 학교생활이 기대치에 못미칠 때면 날아드는 아버지의 매질로 인해서 심한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려 온 것 같았다. 변호인측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로 인한 정신적 후유증이 이번 사건의 주원인이라는 주장을 밀고 나가고 있다.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염군 사건 발생 1년후인 지난해 5월 한국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넉넉한 집안의 명문 사립대학생이 부모를 토막살해한 사건이었다. 반인륜의 대표적 사건으로 한국사회를 경악시켰고 1심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런데 몇달전 대법원은 피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피고가 부모로부터 받은 학대를 참작한 결과였다. 20대 초반의 피고는 초등학교때부터 계속 일기를 써왔는데 그 일기에 엄한 아버지와 히스테리컬한 어머니 밑에서 수없이 혼나고 맞으며 자란 사실, 작은 키, 느린 행동에 대한 부모의 조롱이 그의 가슴에 한으로 맺힌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과 맺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관계는 부자 관계이다. 그런 만큼 부모와 자녀간의 특별한 결속감은 심리학계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 왔다.
1950년대까지 심리학계는 엄마가 아기에게 먹이는 젖, 즉 생명체에게 가장 필요한 음식물이 모자간의 사랑과 유대감을 만든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57년 해리 할로우라는 심리학자가 재미있는 실험을 하면서 그 생각이 바뀌었다.
‘할로우의 원숭이’ 실험으로 잘 알려진 이 실험을 위해 할로우는 두 개의 엄마원숭이 모형을 만들었다. 하나는 철사로 만든 차가운 ‘엄마’, 다른 하나는 그 위에 헝겊을 씌워 부드러운 ‘엄마’였다. 철사엄마에게는 젖병이 장치돼있어 아기 원숭이들이 배가 고프면 가서 젖을 먹었는데 일단 배가 차고 나면 절대로 같이 머물러 있지를 않았다. 반면 헝겊 엄마에게는 가서 몸을 기대고 비비며 같이 있기를 좋아했고, 헝겊 엄마에게 젖병이 있을 때면 아기 원숭이들은 절대로 철사 엄마에게 가지를 않았다.
할로우는 이 실험을 토대로 자녀가 부모에게 느끼는 사랑은 단순히 먹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따뜻함에서 온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아울러 따뜻한 접촉이 부족한 원숭이는 자라서 공격적이고 난폭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후속 연구를 통해 밝혔다.
미주두레공동체 산하 ‘두레 젊은이 운동’이 최근 발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남가주의 한인청소년들은 부모로부터 물질적인 지원은 충분히 받지만, 같이 보내는 시간이 충분치 못하며, 부모의 간섭이 지나쳐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다 너 위해서’ ‘너 잘되라고’우리 부모들이 어느 정도 강압적인 자극을 주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아이의 성취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쳐서, 아이에게 먹을 것은 주지만 차가운, 그래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철사 엄마’ 같은 존재가 되면 곤란하다.
성취에 너무 초점을 맞추다 보면 가장 중요한 ‘아이의 행복’을 잊어버릴 수가 있다. “우리 아이는 나를 엄마·아빠로 만나서 행복한가” 자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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