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찬(金載瓚)은 이조 초기의 황희(黃喜)와 병칭되는 이조 후기의 명재상이다. 그의 젊은 시절 일화다.
한번은 궁에 들어가 숙직을 하게 됐다. 임금은 마침 잠이 오지 않아 김재찬을 불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당시 영의정이던 그의 아버지가 몸져누워 조회에도 나오지 못하고 있는 데 생각이 미치자 인삼을 내렸다.
임금의 자상함에 김재찬은 감격했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뜻밖에도 꾸중을 들었다. "정승이 아프면 임금이 정식으로 문안을 하고 어의를 보내 병세를 진단하고 약을 지어보내는 법이다. 어떻게 한 밤중에 사사로이 그 자식에게 인삼을 보내는가. 그것도 모르는 네가 한심스럽다."
김재찬은 임금에게 들은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임금은 곧 잘못을 사과하고 정중한 문안과 함께 어의를 보냈다고 한다.
"이름을 바로 쓰지 않으면 말이 순리대로 통하지 않고, 말이 순리대로 순조롭게 통하지 못하면 어떤 일도 성사될 수 없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정명(正名)사상이다.
당연히 되어져야 할 일이 당연히 되어질 때 오히려 감동으로 오는 게 요즘 세상이다. ‘경찰관이 시민을 보호하다가 숨졌다’-. 스스로의 존재 이유에 충실했을 뿐이다. 당연히 이름 값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감동을 준다. ‘정명’과 거리가 먼 현실이기 때문일 게다.
테러참사다. 탄저균 공격이다. 위기의 연속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지 않은 감동들이 전해진다. "수백명의 소방관이 위험을 무릅쓰고 시민을 보호하다가 숨졌다." "탄저균 공격위험에도 불구, 수십만의 우체국 직원들은 의연히 평상업무에 매진하고 있다." 이들은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감동적이다.
줄리아니 뉴욕시장. 부시 대통령. 이들도 감동을 주고 있다. 패닉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어서다. 앨 고어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내가 정신적 대통령 운운’ 하지 않고 부시 대통령 영도 하에 전 미국이 단결할 것을 호소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웠고, 야당 지도자는 큰 정치인다웠고, 소방관도 소방관다웠다. 공자가 부르짖은 ‘정명(正名)의 이상(理想)’에는 혹시 미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모두가 이름에 상응해 실질의 모습을 바르게 보여 주었다. 그래서 감격이 있는 것이다.
의원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상원 청사에서 탄저균이 든 우편물이 발견되자 하원은 서둘러 휴회를 선언했다. 그 결과 잠정적이나마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황황한 꼴을 보인 선량 나으리들에 대해 비판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탄저균이 발견됐음에도 불구, 언론사, 우체국 등은 평상업무를 하고 있는데 의원들이 그 정도 가지고 의정을 중단할 수 있느냐는 질책이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연방의원이 그 이름 값을 못할 때 여론의 질타를 받은 것이다.
정승 김재찬의 일화로 되돌아가자. 이 스토리는 이조 500년을 지탱시켜 온 이조의 양반 정신에 대해 적지 않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조선조의 양반, 요즘말로 당시 기득권층이 지닌 도덕성이 그 포인트다. 그것은 ‘정명’을 바탕으로 이룩된 도덕성이고 자긍의 정신이다.
부끄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일종의 자존에 자긍의 정신이다. 아무리 임금이 내린 인삼이지만 예의가 결여되고 또 사사로이 내린 것은 받을 수 없다는 태도가 정승이 정승다운 까닭이다. 또 잘못을 깨닫자 곧 사과를 하는 임금 역시 왕자로서의 금도를 보였다.
AFP 통신이 며칠 전 시쳇말로 ‘골 때리는 보도’를 했다. "한국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싸우는 장면을 담은 필름을 TV광고에 사용할 수 있다"고 뉴질랜드 당국이 유권해석을 내렸다는 보도다. 어쩌다 한국 정치인의 싸움질 모습이 외국의 TV광고에 사용되는 사태에 이르렀을까. 그 발단은 힘께나 쓴다는 사람들이 말의 개념을 제 멋대로 남용하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본다.
이용호 게이트, 또 이와 연루된 권력 수뇌부들의 어처구니없는 처신, 이들의 적반하장격인 발언, 모종의 게이트와 관련해 대통령의 아들의 이름이 실명으로 거론되자 발끈해 ‘국회의원 면책특권 한계론’을 들고 나선 검찰총장. 거기다가 통일, 개혁, 안보 등 일상화된 말의 뜻조차 어느 편에 줄을 섰느냐에 따라 다르게 쓰여지는 현실이다.
말이 제멋대로 사용되고 그 결과 나타난 도덕의 황폐화 현상이다. 이에 수반되는 게 수치를 전혀 못 느끼는 멘탈리티다. 이쯤 되면 중증의 도덕 불감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름을 바로 쓰지 않으면 말이 순리대로 통하자 못하고, 말이 순조롭게 통하지 못하면 그 어떤 일도 성사될 수 없다."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부연하면 이렇게 될 것 같다. "과도한 말장난은 ‘막가파 세태’를 불러온다." 이게 한국의 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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