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여전 서울에 간길에 초등학교 교사인 조카의 집을 방문했다. 해맑고 쾌활했던 조카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리며 그 집에 들어섰는데, 순간 “뭔가 잘못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 여기저기에 쌓인 책더미, 상자들, 함부로 내던져져 있는 잡동사니들…
“방금 침을 맞고 와서 녹초가 되었다”는 그는 집안만큼이나 헝클어져 있었다. “무엇이 30대의 젊은 여성을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었을까”가슴아파 하고 있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시어머님이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나서 몸조리를 하느라고 했는데도 아픈 게 낫지를 않아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8년간 모시고 나니 심신이 모두 망가져서 학교도 휴직하며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자신보다 체중이 무거운 시어머니를 수없이 부축해 눕히며 일으키고, 마지막 2년은 환자가 대소변을 못가려 하루에도 여러번씩 목욕을 시키고 나니 “관절염으로 무릎에 물이 차고, 어깨통증으로 팔을 들수가 없고… ”증상은 한없이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망상증을 동반하는 치매 환자의 앞뒤가 맞지 않는 언행, “우리 어머니가 그럴리 없다”는 남편과 시누이들의 막무가내식 부인과 오해로, 오랜 세월 혼자 억울해하고 분해하다 얻은 신경쇠약과 우울증은 좀처럼 빠져나갈 것 같지가 않다고 했다.
“어떻게 그 일을 해냈느냐고 주위에서 칭찬을 해요. (시어머니가) 끝까지 집에서 계시다 돌아가시게 한걸 나도 잘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겠다면 말릴 거예요. 환자 때문에 다른 사람이 또 환자가 되어서는 안되니까요”
나이가 들면서 누구나 바라는 것은 오래 사는 것, 그리고 단정하고 품위있게 늙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와 ‘품위’를 같이 누리기는 쉽지 않다. ‘오래’든 ‘품위’든 한가지를 포기해야 하는데, 이 또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니 속수무책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체득한 지식·감정, 맺은 관계들, 심하게는 먹고 배설하는 몸의 원초적 기능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단절 당하는 병,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품위도 허용받지 못하는 병, 알자이머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잔인한 병이다. 평균수명이 길지 않았을 때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던 그 병이 지금은 가족이나 친지 한두 다리를 건너면 환자가 있을 정도로 흔해졌다.
황폐해진 조카 때문에 무거운 마음으로 서울에서 돌아왔을 때, LA에서는 한 가족이 치매 노모를 찾느라 기자회견을 하며 제보를 호소하고 있었다. 8월중순 조카딸의 집을 방문중 실종된 김정옥 할머니(86)의 아들 데이빗 정씨 가족이었다.
거의 두달이 지난 지금 정씨의 제보 호소는 여전히 유효하다. 전화벨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낮과 밤을 보내는, 피가 마르는 기다림에서 정씨는 아직도 놓여나지 못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일수도 있습니다. 아니할 말로 육체적 상태가 나빠 쓰러지셨다면 벌써 연락이 왔겠지요. 어머니를 어디 비영리단체 같은 데서 보호하고 있다면 말이 안통해 신원 확인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정씨는 ‘어머니가 이상하다’느끼기 시작한 후 그것이 치매라는 걸 알아차리는데 2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맞는 양로병원 시설을 찾던 도중 이런 일이 생겨” 그는 후회가 막심하다. 노인이 평소와 다르게 행동한다 싶으면 즉시 대비할 것, 그리고 24시간 곁에서 돌볼 형편이 못되면 늦기 전에 전문시설에 입원시킬 것을 그는 충고한다.
우리 모두는 부모에 대해 환상이 있다. 거대한 산처럼 크고 당당하던 분, 생각만으로도 위안이 되던 분이 우리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
그런 부모가 치매에 걸릴 경우 대개는 두가지 함정에 빠진다. 첫째는 “노인들이 다 그렇지”하며 병을 부인하는 것. 부모를 환자로 인정하는 것은 아픔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내가 모셔야 한다’는 강박증이다. 그렇다고 실제로 모실수 있는 가정은 많지 않고, 대신 못 모시는 데 대한 죄의식들이 깊다.
치매에 관한한 환상이 깃들 여지는 없다. 75세가 되면 1/5, 85세가 되면 절반이 치매에 걸리고 일단 걸리면 병은 사정없이 자기 갈길을 간다. 치매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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