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타모니카에 사는 얼 도지는 12일 아침 5살짜리 아들의 놀림을 받았다.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옷을 입혀주던 중이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팬티를 셔츠로 잘못 알고 머리에 덮어 씌웠기 때문이었다.
“엄마 오면 얘기해줘야지!”
아들은 깔깔 웃으며 ‘바보 아빠’를 놀렸다.
“이렇게 해맑은 아이에게 엄마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까”- 도지는 자신이 겪어내야할 충격 못지않게 그것이 지금 문제라고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임상연구가였던 그의 아내 도라는 그 전날 국방부에 떨어진 워싱턴발 아메리칸 에어라인 탑승객중 한사람이었다.
11일 사상유례가 없는 테러공격을 당한후 미국의 전국민이 충격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한인사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죽음을 직간접으로 겪은 사람들, 사고현장 부근의 자녀나 형제가 몇시간씩 연락이 안돼서 가슴을 졸였던 사람들, 남편이나 아내가 뉴욕으로 출장간 사람들… 이야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그런 개인적인 연줄이 없다해도 연일 계속되는 TV보도로 생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다보니 우리 모두가 9월11일 이전과는 다른 삶의 기후를 느끼고 있다.
“분명하게 존재하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데 너무 비현실적이었다”고 신문사의 한 동료는 110층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며 말했다. 도시의 상징적 건축물이 내려앉으면서 뉴욕은 지평선이 바뀌었고, 당연히 있어야 할것이 없어져버린 허공은 뉴요커들에게 가슴 저린 아픔이 되고 있다.
그러나 변한 것이 뉴욕의 지평선뿐일까. 세계무역센터 건물만큼이나 우뚝, 마음의 지평선에 ‘높은 탑’으로 섰던 존재를 순식간에 상실당한 희생자 가족, 친지들은 예고없이 변한 마음의 풍경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남편, 아내, 혹은 딸이나 아들…삶의 축이자 의미였던 존재를 지워내고 그 텅빈 폐허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버지니아의 서정미씨(42)에게 ‘높은 탑’은 남편 이동철씨(48)였다. 출장길에 나서는 남편의 “사랑한다”는 작별인사에 왜 평소대로 “사랑한다” 대신 “보고 싶을 거예요. 조심하세요”라는 말을 했을까. 그것이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뉴욕의 박영규씨(58)에게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성실하게 자라준 맏딸 계형씨(29)가 자랑이었다.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던 날, 86층에서 근무하던 딸은 사실상 건물을 다 내려와있었다. 그러나 “1층까지 내려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밀려서 나갈수가 없다”는 말을 휴대전화로 남긴후 소식이 끊겼다.
“의식불명인채 어디 병원에라도 누워있는 건 아닐까”“충격으로 실성해 거리를 배회하고 있기라도 한다면”“사진을 보면 혹시 누군가 알아보지 않을까”…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해 사진과 전단을 들고 병원과 사고현장을 수소문하는 수많은 뉴욕시민들처럼 박씨 가족과 친지들도 아직은 마음의 지평선에서 ‘박계형’이라는 탑을 포기할 수가 없다.
재해나 사고는 우리에게 삶의 단면을 뚝 잘라서 보여주는 충격이 있다. 타성에 젖어서 나른한 반수면의 상태로 이어져온 삶의 흐름이 갑자기 낭떠러지를 만나 곤두박질치는 충격인데, 이때 관성으로 뭉쳐진 ‘흐름’이 깨어지면서 삶은 단면을 드러낸다.
우리가 인생을 장식하느라 겹겹이 쌓아오던 온갖 것들, 부와 지위와 명예, 하다못해 외모 … 이런 부차적인 것들을 다 벗겨내고 인생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남는 것은 간단하다. ‘내가 죽는구나’하는 순간 떠오르는 대상, 그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는 분명해진다.
이번에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아내나 남편, 어머니등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는 말을 한 것이 죽음 직전에 공통적으로 한 일이었다. 여전히 그 말을 할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 하나만으로도 이 비통한 계절에 얼마나 큰 감사인가. 분명하게 존재하던 것이 한순간 사라질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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