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와 농민’- 무엇인가를 연상시킨다. 공산주의다. 이 두 계층은 공산주의에서 흔히 말하는 프로레타리아 계층이다. ‘노동자’라는 단어를, ‘농민’이라는 단어를 따로 따로 두고 보면 그렇지 않은데 이처럼 연합해 놓으면 어딘지 공산주의 냄새가 물씬 난다.
’블랙과 라티노’(Blacks and Latinos)도 마찬가지다. 두 단어의 연합은 미국의 정치에서는 좌파를 의미해왔다. 미국에서 정치를 말할 때 이 두 단어는 거의 붙어다니다 시피 했다. 인종별 인구 구성이 중요변수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 정치에서 ‘블랙과 라티노’ 하면 바로 미국형 프로레타리아로 통해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보 지향의 민주당내 각 정파 스펙트럼에서도 ‘블랙과 라티노’는 노조 등 특수 집단과 함께 항상 좌파의 선봉에 서 있는 존재로 인식돼 왔던 것이다.
지난 80년대 초였던가. 이런 전망이 나왔다. ‘21세기로 넘어가면서 캘리포니아에서는 새로운 정치적 동맹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다수의 위치를 잃게 될 백인계는 아시아계와 연합전선을 구축한다. 이에 맞서는 정치적 라인-업이 흑인과 히스패닉의 연합이다’ 이 전망은 히스패닉 인구 급증으로 ‘백인 다수’의 인구 구성비가 깨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또 정치, 경제, 사회 문제 등 이슈에 있어 아시아계는 백인과, 히스패닉은 흑인과 비슷한 지향성을 보일 것이라는 진단도 전망의 한 배경이었다.
올해 미국 정치의 최대 뉴스는 ‘히스패닉 파워’다. 센서스 결과 히스패닉은 예상보다 수년을 앞당겨 미국내 최다 소수계 집단으로 부상했고 그와 비례해 정치적 파워도 한층 거세질 것으로 예측되어서다. 이런 분위기에서 조지 W 부시는 히스패닉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싱코 데 마요 축제를 열었다. 리처드 리오단은 자신의 후임으로 안토니오 비야라이고사를 지지하고 나섰다. 부시는 재선을 내다보고, 리오단은 주지사 출마를 염두에 두고 각각 펼친 ‘정치적 쇼’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히스패닉’이라는 단어가 화두로 떠오르는 한편에서 이상기류도 형성되고 있다. 내연상태에 있던 소수민족계간의 갈등이 표면으로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그 갈등은 한 때 ‘블랙과 라티노’ 식으로 한묶음으로 불려지던 두 소수계 집단이 공공연한 충돌 상황을 연출하면서서 더 한층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우스 센트럴 지역이 바로 대표적 현장이다. 라티노 인구가 급증하면서 흑인계는 점차’갈색 바다’위에 떠있는 ‘검은 섬’처럼 느껴지고 결국 히스패닉 견제에 나섰다. 이로 인해 갈등은 날로 심화, 충돌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것. 이는 전국적 현상이다. 조지아주에서,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또 뉴욕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내 최대 소수민족’이라는 뜻은 적어도 흑인계에게 있어 단순히 숫자놀음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민권투쟁을 통해 승리를 얻어냈다는 의미도 숨어 있다. 오랜 세월동안 투쟁해온 결과 흑인계는 민권법 등 자신의 생존과 안녕을 보장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얻어낸 것이다. ‘흑인계 = 소수계 대표’의 등식의 이면에는 이런 ‘블랙 프라이드’도 묻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타이틀인데 그동안 무임승차만 해온 히스패닉에게 그 타이틀이 넘어간다는데 대해 흑인계는 심한 당혹감과 함깨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LA시장 선거가 보여준 특이한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민주당 지도부등 제도 정치권은 대부분이 비야라이고사를 지지했다. 제임스 한 지지세력은 밸리를 거점으로 한 백인보수세력이었다. 거기에 흑인계가 가담했다. 이들은 말하지면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입장에서 뭉친 것이다. 히스패닉계가 파워를 장악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개표결과가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예상대로 히스패닉은 비야라이고사에게 몰표를 던졌다. 백인계 표는 과반수 이상이 제임스 한에게 몰렸다. 결국 흑인 표가 사태를 결정지었다. 제임스 한 지지로 몰린 것이다.
LA는 항상 변화의 선두에 서있다. ‘LA에서 생긴 일’은 그러므로 전국적 변화의 전조로 비쳐지기도 한다. 이번 LA시장 선거는 이와 관련해 뚜렷한 메시지를 전했다. 이번 ‘LA에서 생긴 일’은 앞으로 전개될 ‘블랙과 라티노’간의 대대적 파워 게임의 전초전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게 그 메시지다. 이 메시지에는 또 하나의 밑그림이 숨겨져 있다. ‘파워를 향한 라티노의 대장정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54% 대 46%, 4만여표 차이로 이번에는 라티노 후보가 밀렸지만 4년 후에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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