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힙합제국 만든 션 콤즈, 폭력과거딛고 억대 연예재벌 신화창조
중대한 기로에 직면했던 힙합 뮤직산업의 총연출자로 통하는 31세의 억만장자 션 콤즈의 비즈니스 제국이 일단 고비를 넘겼다.
사건의 발단은 1999년 12월 새벽, 맨해턴 소재 ‘클럽 뉴욕’에서 발생한 총기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콤즈의 개인운전사를 포함한 세 명이 부상을 당했다.
만약 배심원단이 콤즈의 총기 불법소지 및 뇌물수수 혐의를 인정했더라면 콤즈는 꼼짝없이 철창신세를 질뻔했다.
콤즈는 지난 주 법원판결로 형사책임을 면했지만 14억달러의 천문학적 손해배상이 청구된 민사소송이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사건에서 콤즈가 치뤄야 할 가장 큰 대가는 도시청소년 문화상품들을 기반으로 한 그의 비즈니스 제국이 치명상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혹자들은 콤즈같은 기업총수가 어떻게 새벽까지 힙합 댄스클럽에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콤즈의 삶은 처음부터 파티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콤즈는 1993년, 웨체스터 소재 어머니의 집에서 ‘배드 보이’이라는 레이블을 앞세워 음악계에 투신했다.
그후 콤즈는 갱스타 랩뮤지션에 이어 성공적인 사업가로서 주가를 높여나갔다.
그가 제작하고 노래한 랩뮤직들은 수백만장씩 팔려나갔고, 그의 명성 또한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로써, 콤즈는 신인 랩뮤지션으로서 순식간에 소니 및 비아콤 같은 대연예기업들과 자웅을 겨루는 연예재벌의 신화를 일구는데 성공했다.
그는 기업확장의 각 단계마다 작곡, 프로덕션, 배급, 마켓팅에 이르는 제반 분야를 손수 통제하며 사업기반을 다져나갔다.
그 결과, 콤즈는 약관 31세에 연매출 3억달러, 종업원 400명에 달하는 "배드보이 월드와이드 엔터테인먼트 그룹"의 총수가 되었다.
그는 레스토랑 2개, 패션회사, 영화제작사, 테크놀러지 회사 등을 설립했고, 최근에는 영화배우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가 출연한 영화 "메이드"는 이번 여름에 개봉될 예정이다. 이 밖에도 배드보이 그룹은 조만간 냉동식품 분야에까지 뛰어들 계획이다.
오늘날 팬들에게 알려진 콤즈의 예명 "퍼피 대디", 또는 "퍼피"는 이미 하나의 문화적 심볼 이자 거대한 네임 브랜드가 되었다.
콤즈는 마사 스튜어트, 도널드 트럼프 같은 사교계 명사들과 어울리며, 맨해턴 파크 에비뉴에 전용콘도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또 뉴욕주 햄턴스에 별장을 구입했고, 시가 30만달러에 달하는 최고급승용차 벤틀리를 두 대나 굴리고 다닌다.
1999년 포브스지 커버를 장식한 콤즈는 자신의 목표는 흑인 프랭크 시나트라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재정적으로는 레코딩 업계의 억만장자 데이빗 게핀의 재력과 영향력을 능가하겠다는 야심을 피력했다.
그러나, 맨해턴 웨스트 43가 ‘클럽 뉴욕’에서 벌어진 새벽녘의 총기사고는 이같은 그의 야망에 암운을 드리웠다. 특히, 이 사건은 콤즈가 폭력과 범죄로 얼룩진 랩의 세계에서 주류 청소년문화의 신뢰도를 유지하면서, 기업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힘합뮤직 평론가 및 문화비평가 마이클 다이슨은 말한다.
"재벌기업과 밑바닥 폭력문화는 동시에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콤즈는 재벌기업인이 되기 이전부터 각종 폭력사건에 휘말려 왔다.
그는 1999년, 삼페인 병과 전화기로 레코드회사 중역을 구타한 후 분노자제를 위한 심리상담을 명령받았다. 또, 95년에는 대치중이던 뉴욕포스트 기자의 카메라를 때려부순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콤즈의 연예인생은 하워드 대학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대학을 중퇴한 후 뉴욕에 와서, 약관 19세에 맨해턴 소재 ‘업타운 엔테테인먼트’의 아티스트 및 레퍼토리 담당부사장이 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콤즈를 랩뮤직계의 다크호스로 칭하기도 했으나, 결국 2년만에 해고되었다.
그는 한 동안 마운트 버논의 어머니 집에 칩거하며 재능있는 랩가수 물색에 나섰다.
그러던 중, ‘노터리어스 BIG’ 알려진 크리스토퍼 윌리스를 발굴하면서 콤즈의 인생은 다시 한 번 활짝 피게 된다.
월리스는 랩가수로서의 요건을 모두 구비한 진짜 랩가수였다. 그에게는 폭력과 랩 실력, 전과경력, 어두운 시적감각 등이 고루 배어 있었다.
1994년에 발표된 그의 앨범 "레디 투 다이"는 순식간에 폭발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가서 죽을 준비를 해라. 하나님에게 신고를 해라’는 노래말이 크게 유행했었다. 월리스의 프로듀서인 "퍼피 대디’의 명성 또한 덩달아 치솟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명성과 함께 콤즈의 스튜디오에는 머라이어 캐리, 아리타 프랭클린 같은 유명가수들이 선을 대기 시작했다. 게중에는 곡당 25만달러를 지불하는 가수도 있었다. 이 무렵, 콤즈는 하루에 최고 20시간씩 일에 몰두하며 재력을 축적했다. 흑인젊은이 역사상 최고의 기업가가 되겠다는 야심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한편, 랩뮤직 전문가들은 클럽 뉴욕의 총기사건이 콤즈에게서 돈을 뜯어내려는 주변인들의 심산에서 촉발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었다.
콤즈가 젊은 나이에 억만장자가 되자, 어떻게든 그를 궁지로 몰아넣어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무리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법원의 무죄판결을 받은 콤즈가 하루속히 ‘배드 스트리트’의 이미지에서 탈피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