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밀레니엄기행(2)
▶ 죽어서도 혁명 돕는 게바라
신아바나로 들어가자 작은 언덕에 세워진 거대한 탑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흰 조각이 눈을 사로잡았다. 쿠바 독립의 아버지, 쿠바의 조지 워싱턴이라고 할 수 있는 호세 마르티의 동상과 기념관이었다. 근대 스페인 문학의 효시라는 평을 듣는 호세 마르티는 쿠바 출신의 뛰어난 문필가, 언론인이자 혁명가로서 17세에 쿠바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뉴욕 망명생활 등 일생을 쿠바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자신이 조직한 제2차 쿠바 독립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하여 1895년 첫 전투에서 사망한 전설적 인물이다.
그의 이름을 아는 한국인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알고 있다. 우리의 귀에 익은 ‘관따라메라’라는 노래가 바로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다. 높이 140미터의 탑은 카스트로가 대학 시절 바티스타 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해 군부대를 습격했다. 체포되어 유배되었던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섬에서 나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최고의 관광명소 내무부
호세 마르티 기념관 건너편에는 쿠바의 붉은 광장이라고 할 수 있는 혁명광장과 아바나시 최고의 관광명소인 내무부가 자리잡고 있다. 혁명광장은 교황 방문시 대규모 미사가, 그리고 얼마전 미국과 쿠바를 떠들썩하게 했던 에리나 소동 때 에리나를 쿠바로 송환하라는 대규모 항의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혁명광장은 그렇다고 치고 내무부가 관광명소라니 의아하겠지만 그 이유는 한 때 이곳에 근무했던 전설적인 혁명가 게바라의 초대형 초상이 검은 네온으로 형상화되어 회색 외벽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밤에는 네온에 불이 들어와 매우 아름답다. 대학생 기분으로 돌아가 기념품으로 산 게바라 티셔츠와 붉은 별이 달린 검은 베레모를 쓰고 기념촬영을 하자 옆에서 사진을 찍던 유럽 관광객들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멋있다고 코멘트를 했다.
레닌, 마오쩌뚱, 호지명 등 열거하려면 끝이 없는 21세기의 많은 혁명가중 체 게바라처럼 카리스마와 마력을 가진 혁명가는 없다. 대부분의 혁명가들이 소련 동구 몰락 이후 그 평가가 급추락하고 있지만 체 게바라만은 여전히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도 얼마 전 체 게바라 전기가 출판되어 큰 인기를 누린 바 있다. 이는 신비에 싸인 눈빛에 턱수염으로 특징지어지는 영화배우 뺨치게 잘 생긴 그의 얼굴에도 기인하지만 승리 후 현실 정치에 오염되어야 했던 많은 혁명가들과 달리 끝까지 이상을 찾아 투쟁하다 젊은 나이에 사살 당한 극적인 그의 삶과 이상주의, 로맨티즘에도 빚지고 있다.
볼리비아서 생포돼 사살
아르헨티나의 의과대학생으로 남미 자전거 여행에서 비참한 현실을 보고 사회의식을 갖게 되고 의사가 된 뒤에도 멕시코에서 카스트로를 만나 생판 자신과 상관이 없는 쿠바혁명에 앞장 선 그의 삶은 한 편의 영화 그 자체이다. 만성적인 천식환자로 어려운 게릴라전을 이끌어간 것으로부터 혁명 성공 후에 산업부 장관, 중앙은행장 등의 요직을 버리고 어느 날 갑자기 세계 혁명을 위해 쿠바 국적을 반납하고 아프리카 앙고라의 게릴라전을 돕기 위해 떠나는가 하면 결국 볼리비아에서 라틴 아에리카 전체의 해방을 위해 게릴라전을 벌리다 생포되어 사살 당한 그의 일생은 이념과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 왔다.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은 게바라는 죽어서도 쿠바를 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쿠바 어디에 가도 중요한 관광상품은 게바라이기 때문이다. 게바라 사진이 새겨진 티셔츠는 말할 것도 없고 붉은 별이 달린 검은 베레모, 한국의 골프광들이 좋아할 골프채를 들고 그린에 선 게바라 등 다양한 엽서와 사진 포스터들, 이를 이용한 달력, 그의 초상이 새겨진 열쇠고리, 그의 얼굴과 글씨를 새긴 목각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온통 게바라 투
성이다. 한 마디로 게바라가 없었으면 무엇으로 관광상품을 만들어 팔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결국 게바라는 죽어서도 외화벌이를 통해 쿠바 혁명을 돕고 있는 셈이다.
시골 맛을 보기 위해 4 5일의 일정중 하루를 내어 아바나로부터 3시간 거리의 해변 휴양지 바라데로로 향했다. 가는 도중 질이 매우 나쁘기는 하지만 그런 대로 생산은 되는 석유 시추기들, 자신이 5년간 직접 건설에 참여해 노동을 하면 입주권을 주는 방식으로 건설한 대형 아파트 단지들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군데군데 사람들이 모여 있고 노란 재킷을 입은 사람이 그 속에 끼어 있는 광경이었다.
해변 휴양지 바라데로
교통사정이 나빠 교통부 직원들이 지나가는 차를 세워 같은 방향의 사람을 태워주도록 하는 강제 카풀제였다. 사실 아바나만 해도 도로 한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서서 있었는데 이들이 카풀을 기다리던 사람이었던 것을 아바나대 출신의 여행 가이드의 이같은 설명을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과거 마피아들이 해변가에 호텔을 세워 카지노를 운영하던 바라데로는 알 카포네의 별장이 있었을 정도로 미국 갱의 영향이 강했던 곳이다. 관광명소인 미국의 재벌 두퐁의 옛 별장에 들어가자 18홀의 개인 골프장이 시선을 압도하며 미국재벌의 부와 쿠바에 대해 가졌던 미국의 영향력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마지막 날 아바나시의 혁명박물관을 찾았다. 바티스타 시절 대통령 관저로 쓰이던 곳으로 영화 ‘대부 2편’과 로버트 레드포트 주연의 ‘아바나’에서 혁명군에 밀려 바티스타가 도주하는 장면에 나오던 건물이다.
게바라 유골-유물등 전시
박물관에는 바티스타 시절의 고문도구로부터 쿠바 혁명의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쿠바 혁명후 혁명정부의 대미 유화정책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국교 단절을 선언하자 국유화해 버린 웨스팅하우스 등 굴지의 미국 기업 현판들을 떼어다가 진열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그만 침공 등 쿠바 혁명정부 타도를 위한 미국의 1960년대 침공작전에서 노획한 구명정 등이었다. 그러나 혁명박물관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게바라실. 특히 의사 출신인 그가 게릴라 시절 사용했던 치과도구들로부터 총기에 이르는 여러 유물과 그의 유골이 든 검은 관이었다.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을 하다 1967년 사살된 그의 유골을 볼리비아는 얼마 전 쿠바에 보내줬다. 검은 색의 관에 선명하게 쓰여진 ‘체’라는 글씨를 바라보면서 소련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그가 국적을 넘어 그토록 투쟁한 혁명의 실패에 대해 뭐라고 말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마치 그의 답인
것처럼 특유의 신비스러운 그의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은 개방정책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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