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우리 신문사에 새로 부임한 사장과 함께 신문사와 자매방송인 라디오서울과 KTAN-TV 간부들이 지난 주말 테하차피에서 수련회를 가졌다. 토요일은 테하차피의 휴양지 호텔에서 모처럼 3사 간부들이 마음을 열어놓고 서로 협력해 알뜰한 언론매체로 가꾸어 나아가자고 다짐하면서 여흥도 즐겼다.
이튿날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테하차피 인근 산 속에 들어앉아 있는 무량 스님(40)의 태고사를 찾았다. 한국 신문과 LA타임스에도 이미 보도돼 잘 알려진 무량 스님은 벽안의 스님이다.
3개의 불당 중 먼저 지어진 태고사 불당에 앉아 우리는 무량 스님과 함께 공양부터 했다. 이어 우리는 스님과 질의응답식으로 그가 왜 선불교를 선택했으며 또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법을 들었다. 큰 키에 마른 몸 그리고 바다 빛처럼 푸른 눈을 한 무량 스님의 모습은 선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모든 것은 ‘모른다’로 시작된다고 말했다.
나는 코네티컷에서 태어나 성공회 세례까지 받은 에릭 비랄이라는 양키가 왜 기독교가 아닌 불교를 택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는 예일대(지질학과) 재학시절 자기 존재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졌는데 그때 숭산 스님을 우연히 만나 선에서 위안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는 중에 두 차례나 영화 얘기를 꺼냈다. 영화광인 내가 그에게 큰 친근감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인가 한다. 프랑코 제피렐리가 감독한 TV영화 ‘나자렛의 예수’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아 한 때 열심히 예수 연구를 했다고 한다.
그는 이어 자신이 산 속에 태고사를 짓게 된 것은 집념의 소산이라면서 스필버그의 ‘제3세계의 존재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77)를 봤느냐고 물었다. 여기서 우주선을 목격한 주인공(리처드 드라이퍼스)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찰흙으로 괴이한 모습의 산을 만드는 장면이 있다. 이 산은 와이오밍에 있는 ‘악마의 탑’이 실제 모델로 여기서 제3세계의 존재들(외계인)과 세계에서 모인 과학자들과의 만남이 이뤄진다. 그리고 주인공은 외계인의 안내로 우주선을 타고 외계 탐사를 떠난다. 참으로 평화롭고 사랑이 충만한 걸작인데 나는 이 영화의 메시지와 무량 스님의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1994년 태고사가 들어앉은 산 속 땅을 산 뒤 거의 혼자 힘으로 6년 만에 절을 완공했는데 그것이야말로 집념과 믿음의 소산이라고 하겠다.(앞으로 2개의 불당을 더 지을 계획이다). 혼자서 산 속에 길을 내고 물탱크를 세우고 또 가내 발전소를 세웠다는 얘기를 듣고 한 사람의 집념이 해낼 수 있는 경이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무량 스님은 함께 간 동료가 백인으로서 스님이 된 것에 대한 반작용은 없었느냐고 묻자 "내가 백인입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리고 그는 과거 자신이 한국에서 만행 하던 때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그가 한국의 방방곡곡을 만행 하다가 어느 날 오랜만에 대중목욕탕엘 들렀다. 발가벗고 목욕탕에 들어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랬다고 한다. 평소 거울을 거의 쓰지 않던 그가 누런 피부의 한국 사람만 보다가 갑자기 거울 속에 나타난 백인을 보았을 때 "어 저게 누구야" 하고 경악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량 스님은 "아름다움이란 피부의 두께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고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우리는 "성불하십시오"라는 스님의 합장을 받은 뒤 절을 나와 그가 절을 짓기 전에 기거했던 트레일러엘 들어가 봤다. 허락 없이 남의 집을 들어간 셈이나 그의 일상이 궁금해서였다.
눈에 띄는 것은 ‘풀 몬티’와 ‘트루만 쇼’의 비디오테입이었는데 무량 스님이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테입 옆에 놓여 있는 것은 제인 오스틴의 ‘이지와 감정’의 페이퍼백.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무량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저 사람 미국사람이야’라고 말하지요. 그들은 다른 사람을 보고는 ‘저 사람 한국사람이야’ 또는 ‘저 사람 일본사람이야’라고 말하지요. 한가지 관념만으로 사람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분열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일시적인 정체일 뿐이지요. 우리가 그런 생각에서 해방될 때 평화가 있지요.”
지난 비에 쓸려 내려간 길을 고친다고 찬바람 속에 작업하러 가는 무량 스님을 뒤로하고 우리는 속세로 내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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