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전체가 얼음 냉장고였다. 종로 빌딩 계곡에서는 노동자들이 길가에 쌓인 얼음을 망치로 쪼개고 있었다. 건널목 모퉁이에 있는 지하철, 두더지처럼 입구로 솟아오르는 사람, 총총 등 돌려 사라지는 사람들, 나도 층계로 얼마나 내려간 걸까.
어둠 속에서 굉음과 바람을 내지르며 전철이 달려와 소시민들을 태우곤 순식간에 사라진다. 런던 서브웨이나 바다 밑을 달리는 샌프란시스코 바트와 다를 바 없다. 차안은 따듯했다.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난 뒤끝이라 서 있는 사람도 없었다. 도시의 땅 속에 이렇게 평온한 이동 공간이 있다니.
차안에는 애초부터 웃음이란 없다. 화가 난 아니면 무언가 감춘 표정, 대통령 할아버지부터 나이 먹은 사람들은 흰머리를 감추기에 급급한데, 누굴 놀리나 건너편 책을 펴든 소녀는 머리를 하얗게 물들였다. 입구의 새침한 여인의 몇 가닥 노랗게 물들인 머리카락, 콧날도 새촘하게 솟아 있다. 바꿔 바꿔가 유행이다 보니 토종여인 보기 힘들다지만 그래도 그 얼굴이 석상처럼 반듯한, 눈이 마주치면 꽃처럼 활짝 미소짓는 서구여인 보다 왠지 편안하다. 외간 남자와는 애써 눈길조차 외면하는 그 무심 뒤에 숨겨진 따뜻함, 부푼 가슴 잔뜩 동여맨 듯 입을 다문 게 아닐까.
가끔 휴대폰 벨소리, 할머니까지 호주머니로부터 가방으로 이어지는 확인 작업도 잠시, 선택된 한사람만 별 볼일 없는 독백이 시작되면 모두는 다시 무표정이다.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걸까, 혹시 경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범인이 정부, 재벌인지 국제금융 세력인지, 아니면 초등학생들을 단체로 밴쿠버 공항에 줄 세우는 그 성스런 치맛바람을 탓하는 건지.
아무튼 차안의 서민들은 오늘 아침 나처럼 한국어로 꿈꾸다가 일어나 한국말 일기예보 들으며 청국장 먹고도 식사 후 칫솔질도 않고 당당하게 거리에 나섰으리라, 그리고 사람이면 그냥 사람이지 황색인으로 구분되는 긴장 따위는 없었다.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데, 이제는 삶을 잘 살고 못 사는 잣대로만 재는 버릇은 바꿔보자. 어제는 산업 대형화의 산물이긴 해도 거대한 서점엘 가봤다. 꽉 찬 인파 속에서 "나를 키운 것은 내 이름 앞에 붙은 해직교사라는 말이었다" 해직으로 시에 전념한 시인에게서 나는 새로운 길을 보았다.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누구에게라도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세 줄뿐인 이 시가 금전주의에 찌든 사회에 얼마나 준엄한 꾸짖음 하는가.
영혼의 언어로 원고지에 처방전을 쓴 의사의 유고 수필집을 펼쳤다. 세계대전 직후 파산지경인 독일, 그 해 초겨울 베를린 교향악단이 다시 연주를 시작했을 때, 음악당 밖에는 매일 밤 누더기를 걸친 수백 명의 청중이 창 틈으로 새어나오는 선율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는 대목에서 나는 오랫동안 도서실 천장에 눈길을 두었다.
나의 단상을 깬 사람은 여행가방을 들고 전철에 오른 중년 신사였다. 가방 손잡이에 매달린 CD 플레어에서는 새드 무비 몇 소절, 감미로운 팻 분의 모래 위에 사랑의 편지가 맛보기로 이어진다. 당연하다는 듯 모두 눈감고 ‘한밤의 음악 편지’ 30년 전 과거로 떠나보자는 눈치다. 외국 팝송이 우리들 청소년시절 정서를 선도하였으니 결코 개운한 추억은 아닌데도 어떠랴. 세 개의 CD, 가사집까지 만원 한 장, 제일 먼저 구입한 손님은 뜻밖에도 단발머리 소녀였다. 영어 공부는 팝송과 함께 라는 그 신사의 상술이 적중한 걸까.
서울을 떠나기 전날 저녁에는 강북에서 대학동창들을 만났다. 소대장으로 제대하여 산업전사였던 친구들이 대부분 정든 직장을 떠나 있었다. 나이가 젊어진 직장은 풋풋한 분위기나 연륜에 따른 경험 축적 대신 살아남기 위한 전쟁터가 되었단다.
강원도에서 토종닭을 기르며 밀린 책을 읽는 친구, 돈과는 관계없이 해보고 싶던 일을 찾은 동창, 한 끼 정도는 다이어트도 하는데 좀 가난하면 어떠랴, 빈곤에의 적응력으로 육체적 구속을 정신적 자유로움으로 전환시키는 친구들은, 국민 소득이 형편없다고 그들 예술마저도 뒤진다고 할 수 없는 북한, 그들의 자존심도 곰씹어 보는 듯 했으며, 행복지수는 방글라데시처럼 경제 미개발국이 세계 선두라는 사실도 인지하는 듯 싶다.
돌아 올 때는 친구들이 동승을 권했지만 전철이 편했다. 월남에서 사업하는 창수와 동행하면서 지난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먼저 강남 대치동에서 내려야 했다. 창수는 손을 굳게 잡으며 "또 30년 후에 보게 되냐. 그때까지 열심히 살자"
30년 전만 해도 배밭이었을 이곳 지하철 출구 서니 숨이 차다. 얼어버린 하늘에는 알몸의 보름달이 나목 잔가지에 걸려 심하게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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