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계를 해본 적이 없어요. 계는 커녕 적금 한번 부어본 적도 없어요. 생활비에서 백몇십불, 2백몇십불씩 떼어내서 꼬박꼬박 붓다가 목돈 몇천불 마련했다고 행복해하는 주부들 보면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저는 그런 생각만 해도 골치가 지끈거려요.
그런데 제가 요새 계를 합니다. 너무 너무 재미있는 계입니다. 일명 ‘금사두’ 계, 좀더 길게 하면 ‘금야사발가’라는 계입니다. 좀 들어보시겠어요? 이름은 별난 것 같지만 시작은 아주 단순했어요.
Y라는 후배가 있어요. 옛 직장에서 알게됐는데 나이가 10년 넘게 차이가 나는데도 덤벙대는 저를 오히려 언니처럼 챙겨주는 후배입니다. 이 친구가 윌셔에 있는 미용재료상을 인수했는데 하루는 제 머리에서 새치를 발견하고는 좋은 염색약이 있으니 금요일 저녁 가게문 닫을때쯤 들르라고 해요. 그러마고 약속을 했지요.
그런데 또 J라는 꼬마친구가 있어요. 20대의 어린 아가씨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굴지의 광고회사에서 서부지역 총책임을 맡고 있는 막강 실력자입니다. 뉴욕에서 LA로 발령받아온지 1년남짓. 저의 딸이 대학으로 떠난후 빈둥지를 지키는 늙은 엄마새가 되어 외로울 때 가장 많이 함께 저녁밥을 먹은 친구예요. 그날도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내일 이런 약속이 있다고 했더니 자기도 회사일 때문에 흰머리가 많이 생겼다고 보여주데요. 그래서 다음날 함께 Y의 가게에 가기로 했습니다.
또 한 사람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중요하기로 꼽자면 몇 안되는 친구 S. 오래전 신문사에서 함께 일했던 후배인데 저는 진작에 그곳을 떠나 강물의 이쪽 편 언덕으로 와있는데 반해 S는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며 탄탄한 문장력과 예리한 필치로 많은 애독자를 갖고 있는 중견언론인입니다. 앞이마에서부터 흰머리가 하얗게 올라온다며 속상해하던 S가 이 ‘모의’를 듣고는 반색을 하며 Y네 가게로 합류하게 됐습니다. 물론 J와 Y와 S는 우리 집을 드나들면서 이미 모두 친해진 사이랍니다.
이 네여자의 염색계 첫날이 대성황리에 끝났음은 요즘 말로 ‘당근’이었겠지요?
서로 돌아가면서 보라색 빨간색 물감을 입히고, 중화제를 발라주고, 한사람이 착색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먼저 끝낸 사람 머리를 감기고, 또 한편에서는 드라이어로 스타일을 내주는 재미가 얼마나 짜릿짜릿했을지 상상해보세요.
가게문은 이미 닫았지요. 남 퍼주는데 둘째 가라면 서러운 Y는 가게에서 제일 좋은 염색재료 다 꺼내놓고 좋아서 해해호호하지요. 70년대, 80년대의 그리운 노래들은 계속 CD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고, 여자들이 모였는데 군것질이 없겠으며 화제가 바닥이 나겠어요? 각자 서로 다른 분야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다가 나이도 20대의 J, 30대의 Y, 40대 초반의 S, 후반의 저까지 고루 퍼져있으니 그 모임이 한번으로 그칠수 있겠나요?
그래서 금요일밤 네 개의 머리놀이계는 매달 한번씩 이어지게 되면서 ‘금사두’ 계가 됩니다. 회를 거듭하면서 이제는 각자의 머리숱이나 머리결에 따라 무슨 약을 어떻게 써야하고 시간을 얼마나 조절해야 되는지 점점 더 물리가 트여가고 있지요. 한달에 한번 돌아오는 금요일 저녁은 온전하게 여자들끼리만의 날로서, 마치 계집아이들이 엄마 없는 방에 들어가 화장대 앞에서 새새닥거리는 유년으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하고, 여자대학의 기숙사 주말 같기도 한 그런 밤이 됩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붓질을 해주면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살에 머리를 감기면서, 둘씩 둘씩 속삭이는 대화도 정겹고 모두 함께 나누는 농담과 폭소, 그리고 목청껏 따라 부르는 학창시절의 노래들은 일상의 먼지와 찌든 때까지 말끔히 벗겨줍니다.
어떤 날, 흥이 넘치거나 일찍 염색이 끝나는 날은 노래방도 갑니다. 그러면 그게 바로 ‘금·야·사·발·가’(금요일 밤, 넉사자, 머리발, 노래가) 계가 되는 거지요. 20대의 J가 ‘가시나무’로 잔잔하게 신고식을 하면 386세대의 Y는 ‘목로주점’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평소엔 날카롭던 S가 간드러지게 ‘남남’을 불러제끼면 비로소 우리는 뒤집어지지요. 이때부턴 명함에 박힌 직업이 다 없어지면서 즐거운 금요일 밤은 무르익어갑니다.
이런 계, 당신도 해보시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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