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맞는 새해이건만, 마흔을 한참 넘기면서 맞는 새해는 그저 기쁘고 새롭기보다는 아무래도 초조한 느낌이다. 큰 딸 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씩씩하게 구원의 여신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나타나시던 어머니가 어느새 칠순을 훌쩍 넘겨버린다 싶더니, 이젠 아예 드러누워 노인 행세를 하신다. 남편은 날이 갈수록 바깥일이 바빠진다며 손바닥만한 뒤뜰 밭뙈기에 꽃 심는 일 조차 꺼린다. 어느 새 훌쩍 자라 12학년이 되며 서서히 엄마 품을 떠날 준비를 하는 아들을 보면, 그 초조함은 더해 질 수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초조함을 즐긴다. 비교적 음악회를 자주 찾기도 하고, 스스로 자주 열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초조함을 즐기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 심호흡을 하며 기다리는 출연자들의 모습을 보라, 상기된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겨운지. 무대 뒤에서 청중들의 반응을 궁금해하며 연신 가슴을 쓸어 내리는 어린애 같은 순진한 모습을 보라, 얼마나 애틋하고 사랑스러운지. 이 초조함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음악의 길을 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시름 다 잊을 수 있는 순간이다. 세상의 시끄러움 다 잊을 수 있는 순간이다. 시간조차도 멈추게 할 수 있는 순간이다.
터질 듯한 이 초조함은 지난 성탄절 연주회 때도 어김없이 나를 흥분시켰다. 몇 달 동안 이 책 저 책 뒤지며 씨름해 왔던 헨델이 이젠 편안함 느끼게 하는 오랜 친구가 되는 순간이었다. 연주 시간을 1분 단위로 나누면서 까지 철저하고 세밀하게 짜 보려 했던 프로그램이 이젠 완벽한 지침서가 되는 순간이었다. 모자라기만 했던 연습시간이 넉넉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무 말 없이 연습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애태웠던 그 사람, 사랑스럽고 고맙기만 한 사람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한 순간 폭풍처럼 뇌리에 스칠 때, 막상 나를 무대 앞까지 끌고 온 것은 내가 아닌 그 어떤 신비로운 기운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초조함은 예기치 못했던 어떤 일을 당할까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상실에의 아쉬움에서 비롯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감성적인 중년 아낙네일 수밖에 없는 나는 때로 견딜 수 없는 초조함에 휘청거리기도 한다. 가정이라는 삶의 보금자리가 때로는 벗어나고 싶은 굴레로 느껴질 때가 그렇고, 노부모를 걱정하는 일, 남편을 돕는 일, 자녀를 기르는 일이 짜증스러워 지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 상실에의 초조함, 혹은 허무에서 오는 초조함일 것이다. 그렇다, 모두가 가정이라는 이름 아래 아름다움으로 치장되어 그런 휘청거림은 차라리 유치한 센티멘탈리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스치는 바람에 눈물 흘리지 말란 법은 없다. 떨어지는 낙엽에 옷깃 여미지 말라는 법은 더욱 없다.
악악거리며 살다가도 되돌아보면 그게 아님을 깨닫고는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세상은 생각처럼 그리 공평하지 만은 않기 때문이다. "착한 여자"로 길들여진 우리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럴 바에는, 초조함에 휘청거리기보다는 초조함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초조함은 새로운 삶의 에너지, 애틋한 희망, 그리고 화려한 무대의 조명을 기다리는 일이다. 나는 올해도 무대 출연을 준비하기 위해 합창연습을 할 때처럼 또 한 해를 살 것이다.
"합창 연습을 할 때처럼 또 한해를 살자. 음(音)이 틀리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로. 다른 파트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방해를 받지 않고 자기의 음을 내는 분별과 확신으로. 혼자 만의 목소리가 너무 튀어나오지 않게 유의하면서도 기죽지 말고 떳떳하게 화음을 이루도록 애쓰는 자세로 매일을 살자." (이해인의 "꽃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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