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여름 카터 행정부는 취임후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70년대 초 원유가를 4배로 올렸던 OPEC은 이해 기름 값을 다시 두 배 인상했다. 미 국민들은 주유소마다 장사진을 치고 늘어서 서로 기름을 넣겠다고 아우성이고 이란에서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인질로 잡힌 후 좀처럼 풀려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캠프 데이빗 산장에 열흘 동안 칩거에 들어갔던 카터는 7월 14일 백악관으로 돌아와 다음날 ‘국민 모두가 물질주의적 탐닉에서 벗어나 이웃과 가정을 돌보면서 정신적 보람을 찾자’는 요지의 대 국민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미 국민 2/3가 시청한 이 연설은 처음 국민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받았다. 연설이 끝난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5%가 대통령의 생각과 의견을 같이 한다고 답했으며 평론가들은 “대통령 취임후 가장 훌륭한 연설”이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월 스트릿의 반응은 달랐다. 가뜩이나 높은 수준이던 금리가 오르고 달러는 폭락하면서 금값이 뛰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 형편이 도덕적 정신무장을 호소하는 대통령의 설교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투자가들의 의사표시였다. 금융시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투자가들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 의장으로 앉히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보좌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여러 경로를 통해 추천대상에 오른 인물중 항상 1순위를 차지하는 것은 폴 볼커라는 이름이었다. 지난 30년간 연방 재무부와 뉴욕 연방 은행 월가의 금융회사를 오가며 경력을 쌓은 볼커야말로 FRB 의장으로서 최적임자였다.
그의 지명이 확정되려는 순간 카터의 절친한 친구이자 경제 정책 자문관이던 버트 랜스는 전화를 걸어 간곡히 말렸다. 볼커 같이 독립성이 강한 인물을 의장 자리에 앉히면 FRB에 발목이 잡혀 차기 대선에서 이기기 힘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사방에서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사면초가 상태에 놓인 카터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과연 그가 폴커를 지명했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금융시장은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10여년간 고개 숙일줄 모르고 두자리수를 달리던 인플레가 잡히기 시작한 것도 볼커 취임과 동시였다.
그러나 카터는 비싼 정치적 대가를 치렀다. 카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볼커가 인플레를 잡기 위해 무자비하게 금리를 올렸기 때문이다. 미국이 80년 수십년래 최악의 불황으로 빠져들자 카터는 눈물을 삼키며 대통령직을 레이건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새해 초장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다. 개장 첫날인 2일 하이텍의 본산 나스닥은 2년래 최저 수준으로 폭락했으며 제조업의 활기를 재는 지표인 제조업 지수도 10년래 바닥을 기록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는 97년 IMF 사태 이후 최악의 경제란에 직면해 있고 남미와 구소련권은 만성적 불경기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미국 다음으로 경제 규모가 큰 일본은 10년째 계속되고 있는 장기 침체의 늪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쓰러질 경우 세계 경제를 지탱해 줄 버팀목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경기 둔화에 대처해야 할 부시 행정부는 110여년만에 처음 유효표에서 지고 대통령이 된 약체 정권이다. 의회도 상하 양원 모두 공화 민주 양당이 반쪽씩 갈라 먹은 상태라 리더십을 기대하기 힘들다. 모든 미국인의 눈이 앨런 그린스팬 FRB 의장의 일거수 일투족에 집중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힘있는 인물로 흔히 대통령을 꼽지만 경제에 관한 한 그 영향력에 있어 누구도 FRB 의장을 누르지 못한다. 92년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제일 처음 만난 사람중 하나가 바로 그린스팬이며 올해 부시 당선이 확정된 후 일착으로 면담한 인물도 그린스팬이다. 미국은 물론 전세계 금융시장이 그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으며 델피의 신탁보다 난해하다는 그의 한마디 뒤에 숨은 뜻을 파악하기 위해 증권회사마다 그린스팬 어록 분석 전문가를 고용하고 있다.
1987년 FRB 의장직에 취임한 그린스팬은 그해 10월 일어난 주가 폭락과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98년 러시아 파산등 숱한 난국을 교묘히 헤쳐 나오며 지난 10여년간 미국인들이 사상 유례 없는 경제호황을 누리게 한 1등 공신이다. 한 비즈니스 잡지가 ‘우리는 하나님을 빋는다’ 대신 ‘우리는 그린스팬을 믿는다’를 커버 스토리로 한 것만 봐도 금융계의 그에 대한 신뢰를 짐작할 수 있다.
올 미국 경기가 어떨 것인지에 대해서는 불황 진입설과 경기 둔화설이 맞서고 있지만 90년 이래 불황의 위험이 가장 큰 해가 될 것이라는데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다. 경제 황제 그린스팬이 어떤 묘수로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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