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대부분이 국내정책과 관련해 주요 업적을 남겼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정책, 해리 트루먼의 페어 딜정책, 또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정책 등이다. 클린턴도 주요 업적을 남긴 대통령으로 기억될까.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헬스케어 등 클린턴의 주요 국내정책 개혁 드라이브가 모두 무위로 그쳤기 때문이다. 클린턴 시대는 그러나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대로 구분될 전망이다. ‘클린턴 시대 8년’을 마감하는 대선 결과 미국사회는 한 세기만에 가장 파당적으로 분열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탄핵정국 때 이미 시작됐다고 보아야 될 것 같다. 말하자면 클린턴 탄핵을 둘러싸고 전개된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정면 대립이 잠복기를 거친 후 재차 확산됐다. 그 결과는 정치적 양극화다" 올 대선이 대접전이 된다는 것은 당초부터 나온 예상이다. 그러나 마치 혈전의 15라운드가 끝나고도 펀치가 계속 난무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이번 대선에 대한 조명이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함께 나오는 진단은 양극화의 선거결과는 바로 ‘클린턴 시대의 유산’이고 이로 인해 차기 대통령은 국정수행에 큰나큰 장애에 부딪힐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2000년 대선은 한마디로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파당적 분열상을 보인 선거로 전통적 파당적 이데올로기가 가장 큰 변수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권자 10명중 9명 이상이 조지 W 부시에게 표를 던졌고 민주당원도 근 90%가 앨 고어를 지지했다. 또 전국 라이플 협회는 공화당을, 노조는 민주당지지 전초역할을 하는 식으로 각 이해집단과 정당간의 전통적 정치적 동맹관계 역시 굳건하다는 사실을 드러낸 게 이번 선거다. 재삼 확인된 사실은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을 대변하는 민주, 공화 양당의 파워 베이스도 확연히 나뉘어져 있다는 점이다. 여성유권자, 마이너리티와 노조와 도심지역 등이 민주당 파워베이스. 반면 공화당 지지기반은 남성유권자, 백인, 비노조원, 농촌지역 등의 연합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새삼 확인된 것이다.
이같은 양극화 현상은 그러면 어디서 비롯됐을까. 소송으로 얼룩진 클린턴 시절의 시대상황이 그 출발점으로 보인다.
클레어런스 토머스와 리차드 보크 인준 청문회. O.J. 심슨재판. 폴라 존스와 르윈스키 스캔들. 이 사건들은 ‘클린턴 시대 8년’의 시대상을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이 잇단 사건들이 가져온 후유증은 궤변과 냉소주의의 만연이다. 반면 역으로 그에 따른 분노와 혐오감을 확산시킨 사건들이기도 하다. 이같은 시대상황에서 미국 사회의 양극화는 이미 발아가 시작됐다는 진단이다. 정치무대로 눈을 돌리면 이 양극화의 조짐은 화이트워터 스캔들에서부터 발견된다. 여기서 시작해 워싱턴은 파당적 분열의 수렁에 점차 깊게 빠져들게 된 것이다.
클린턴이 제42대 미대통령에 취임할 무렵 그동안 워싱턴을 짓눌러온 파당적 대립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12년만에 처음으로 민주당은 연방상·하원에서 다수를 차지했다. 거기다가 민주당이 백악관마저 점령해서다. 클린턴은 그러나 너무 서둘렀다. 진보 이데올로기의 주요 의안을 잇달아 내놓았던 것이다.
처음부터 착오였다. 정권초기부터 정면돌파를 시도하다가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켜 우파를 자극했다. 보수파의 역습이 시작됐다. 이른바 ‘깅그리치 공화당’의 승리가 그것이다. 이후 워싱턴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파당싸움으로 극도의 체증을 맞게 된다. 주요 의안 표결에서 예산처리에 이르기까지 양 진영은 번번이 충돌해 온 것이다. 그 충돌이 극대점에 이른 시기가 98년 탄핵정국이다. 하원에서 탄핵을 당한 클린턴이 상원서는 면죄부를 받음으로써 이 대격돌은 일단 무승부로 끝났다. 이후 양 진영은 숨고르기를 하면서 결정적 대회전에 대비를 해왔다. 2000년 대선이다.
"미국은 두 개의 나라로 나뉘었다. 1억 유권자들의 선택이다. 미국은 지역적으로, 문화적으로 또 가치관에 있어서도 둘로 정확히 쪼개졌다. 의회는 이같은 상황을 완벽히 구현하고 있다. 상원 의석은 거의 정확히 50대 50으로 나뉘었다. 하원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단 한명이다. 대통령직을 반씩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시사주간지 타임의 2000년 대선 결과에 대한 총평이다.
투표가 끝난지 4주째를 맞은 현재에도 누가 차기 대통령인지 결말이 안 났다. 극도의 혼미상태다. 고어 진영은 플로리다주 정부의 공식적인 재개표결과 승복을 거부, 마침내는 ‘민주당 아성의 3개 카운티 수개표를 허용하고 이를 주 전체 개표집계에 가산시키라’는 플로리다주 대법원의 결정을 유도해내는데 성공했다. 이번에는 부시 진영이 반발하고 나섰다. ‘민주당 법원이 민주당 후보를 위해 내린 파당적 결정’이라는 비난과 함께 연방대법에 이 문제를 끌고 간 것이다.
소송이 소송을 불러오는 혼돈이 확산되면서 피로감만 쌓여가고 있다. 이른바 ‘재개표 피로증세’다. 이와 함께 분열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4,900여만명의 미 유권자들은 저마다 플로리다 재개표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낙착되든 결코 공정한 결판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고어 진영은 고어진영대로, 부시 진영은 부시진영대로, 연방대법이 개입해 판정을 내린 결과 자파가 패배하면 저마다 백악관을 도둑질 당했다는 극도의 상실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대선 후의 혼미한 정국이 파당적 법정 소송으로 이어져 헌정위기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나오고 있는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총체적 결론을 내리면 이렇게 요약되는 것 같다. ‘한 세기만에 가장 양극화 된 미국의 현 모습은 다름 아닌 클린턴 시대의 유산이다. 제43대 대통령이 누가 되든 차기 대통령은 양극화의 결과로 한층 깊어진 이데올로기의 골에 갇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국정은 표류상태를 맞는다. 차기 대통령에게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과제는 그러므로 이 ‘클린턴 시대의 유산’을 하루라도 빨리 청산하고 중도적 입장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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