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그러니까 12년전 조지 부시와 마이클 두카키스의 TV토론을 현장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양 후보의 열띤 공방전이 끝난 후 옆자리의 미국인 기자에게 누가 승자 같으냐고 의견을 물었다.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 "부시가 더 대통령처럼 보인다(Mr. Bush looks more presidential.)"
이 ‘Look Presidential’(대통령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그런데 보통 어려운 게 아닌 모양이다. 대선 막바지 때마다 열리는 TV토론의 온갖 예상질문에 대비, 각 후보진영은 전문가를 동원해 ‘보다 더 대통령처럼 보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지만 결과는 오히려 ‘덜 대통령 같아 보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치가 TV시대를 연 원년은 1976년이다. 1960년 사상 처음으로 케네디와 닉슨의 TV토론이 열렸으나 카터와 포드의 대결이 정례화된 첫 번째 TV토론이고 이후 4년마다 어김없이 TV토론이 열렸다. 이같은 TV시대를 맞아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게 대중적 스타의 자질이다. 일종의 ‘TV 퍼스낼러티’같은 면모다.
TV 퍼스낼러티란 말은 대중매체로서 TV의 특성과 관련해 나온 말이다. TV는 안방을 파고드는 대중매체다. 대중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닮은 인물을 이 대중매체를 통해 보기를 원한다. 전설시대 할리웃을 주름잡은 스타일의 수퍼스타는 TV에 어울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너무 잘나서 대중이 외면하기 때문이다. 대중이 좋아하는 퍼스낼러티는 서민적 풍모에 편안한 이웃 같은 인물이다.
TV시대에 정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는 마냥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만 풍겨도 곤란하다.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아울러 요구되고 있다. 대중이 대통령 후보에게 주문하는 게 바로 이같은 이중적 자질이다. 대권주자는 누구나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또 지도자로서 일종의 만능 해결사와 같은 능력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모든 것을 겸비한 지도자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부족된 부문은 그러므로 적당한 연기로 때울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TV시대에 가장 성공적인 정치 지도자로는 레이건이 우선 꼽힌다. 레이건은 오랜 배우생활을 통해 몸에 밴 연기력과 스피치로 TV시대에 가장 성공적인 정치 지도자로 입지를 세웠다.
클린턴도 레이건에 못지 않은 TV시대형 정치인이다. 매끄러운 스피치 솜씨와 천성적으로 타고 난 연기력, 거기다가 TV매체에 대한 얄미울 정도로 기민한 적응력이 클린턴 성공의 요체라는 지적이다. 클린턴은 마이크 다루는 기술이 탁월하다. 거기다가 TV 카메라가 클로즈업시켰을 때 표정연기가 뛰어나다. 잇단 스캔들로 코너에 몰렸을 때 클린턴이 선보인 게 바로 이같은 연기력으로 물기를 머금은 듯한 눈망울로 호소하는 클린턴의 모습은 특히 여성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평이다.
앨 고어와 조지 W. 부시가 첫 라운드의 TV토론을 끝냈다. 토론 직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고어가 승리했다는 쪽이 많아 고어의 판정승으로 비쳐지고 있다. 이슈 장악력, 각종 통계수치를 제시하는 치밀성, 또 스피치 솜씨등 모든 면에서 예상대로 고어는 부시를 눌렀다는 평이다. 그런데도 고어가 ‘Look Presidential’하다는 이야기는 아직 별로 나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부시가 더 대통령처럼 보인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말하자면 고어는 분명히 전투에서는 이겼는데 전쟁에서는 이긴 것같지 않은 형국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고어는 내용 제시에서는 성공했지만 스타일에 문제가 있는지 모른다. TV시대 대중의 정서와 맞지 않는 이미지 때문인지 모른다. 대중의 신뢰도에서 부시에게 뒤져서 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두 차례 토론이 남았으니까 아직까지 속단은 금물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Look Presidential’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요인이 더 첨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솔직성과 용기다. 이는 TV시대에도 정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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