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살겠다 갈아보자!"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 하나는 한국의 자유당 말기 야당이 내건 선거 구호다. 다른 하나는 지난 92년 미대선시 클린턴 민주당 진영의 슬로건. 이 정치 슬로건들은 한 가지 명제와 관련해 대세의 포인트를 잘 지적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는 근본에 있어 경제에 대한 국민투표다’라는 명제다.
경제가 좋을 때는 현직 대통령이 속한 정당이 대선에서 이긴다. 이는 미정치에서 상식이 된 법칙이다. 예외는 전쟁등 비상시기. 1968년 월남전이 한창일 때 이 법칙은 깨졌다. 1980년 대선시 미국경제는 허덕이고 있었다. 레이건이 현직 카터를 물리쳤다. 88년에는 현직 팀인 부시가 이겼다. 경제가 괜찮았기 때문이다. 92년은 "It’s the economy, stupid!" 구호에 밀려 현직인 부시가 참패한 해다.
이 법칙을 적용하면 올 대선은 하나마나다. 미국 경제가 그야말로 기록적 호황을 맞고 있어서다. 거기다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외부의 위험 요소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조지 W. 부시가 지지도에서 사실상 현직인 앨 고어를 줄곧 따돌리고 있는 것이다. 고어는 대선 레이스가 시작된 이래 한번도 조지 W.를 따라잡은 적이 없다.
왜 이런 이변이 일어나고 있을까. ‘클린턴 피로증후군’ 때문이라는 게 그 정답 같다. 1년여전, 그러니까 자천타천의 대권 지망생들이 저마다 출마여부를 타진하고 있던 무렵 이런 가능성이 일각에서 제기됐다.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공화당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건 닉슨인데 공화당 후보로 나선 포드만 애꿎게 그 피해를 입었다. 마찬가지로 200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클린턴이 남긴 섹스 스캔들의 죄과를 뒤집어 쓸 수도 있다."
이 변수를 언론은 ‘클린턴 피로증후군’이라고 불렀다. 그 피로증세가 극도에 다다른 시기는 1998년. 르윈스키 섹스 스캔들과 관련해 클린턴 탄핵이 추진될 때다. 사실 클린턴 행정부 출범과 함께 하루가 멀다고 줄곧 터진 게 각양의 스캔들이다. 이런 스캔들, 저런 스캔들이 엎치고 겹치다 보니 혼란만 가중되고 있는 판에 탄핵정국을 맞아 워싱턴 정가가 전례 없이 파당적으로 치닫자 피로도는 극점에 이른 것이다. 그러자 여론이 들고 일어섰다. 그만하면 됐고 독을 깨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질책이다. 클린턴은 말하자면 이같은 여론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셈이다.
클린턴은 그러나 잘못 판단을 한 것 같다. 탄핵 묘면을 면죄부 획득으로 오판, 회개하는 죄인의 모습은 간곳 없이 여론은 내편이다는 식의 자만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마디로 밑바닥 정서를 잘못 읽은 것이다. 이같은 클린턴의 자기 도취적 행태에 여론이 돌아섰다. 이와 함께 잠시나마 잠복상태를 보이던 ‘클린턴 피로증후군’은 다시 확산, 일부에서는 ‘클린턴 혐오증후군’으로까지 변질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주 공화당 전당대회의 숨겨진 아젠다도 다름 아닌 ‘클린턴 피로증후군’이었다. 온정적 보수주의를 표방하면서 미국적 가치관의 재정립을 주창하고 나선 조지 W.의 연설도 따지고 보면 ‘대통령 집무실을 섹스의 밀회장소’로 만든 클린턴의 도덕 수준을 간접적으로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러닝메이트 딕 체니의 연설은 더 직접적이다. ‘후보 인격론’을 거론, ‘클린턴이나 고어나 마찬가지’라는 식으로 몰고 간 것이다. 이 작전은 먹혀들었다. 전당대회 직후 조지 W.의 인기가 수직상승, 고어와의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진 게 그 증거다.
’클린턴 피로증후군’이 올 대선의 향방을 가늠할 가장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고어의 러닝메이트 결정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민주당의 취약점을 파고든 공화당 공세에 대응, 고어는 가장 강력한 당내 클린턴 비판자이자 ‘상원의 양심’으로 불리는 조셉 리버맨 상원의원을 부통령후보로 영입했다. 이 승부수는 적중했다. 고어의 지지도는 급상승, 부시와의 격차가 17%포인트에서 2%포인트 이내로 좁아든 것이다. 이는 그러나 다른 한면 민주당 지지자들도 ‘클린턴만은 곤란하다’는 메시지를 띄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측대로 올 대선이 워터게이트 스캔들 직후의 1976년 대선을 방불케 할 것인지는 아직은 좀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확실하다. ‘올 대통령 선거는 경제에 대한 국민투표’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보다는 ‘클린턴 스캔들에 대한 국민투표’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느낌이다. 해서 이런 슬로건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못 봐주겠다, 갈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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