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미 카터 전대통령의 수석보좌관을 지내고 현재 애틀랜타에서 사업을 하는 해밀튼 조던이 최근에 낸 책 ‘나쁜 날 같은 것은 없다(No Such Thing as a Bad day:롱스트릿 프레스 간)’에서 발췌했다.
미국과 서구 대부분에서 암이란 단어는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미국내 암환자의 50%가 치유된다. 세가지 암을 이겨낸 나는 3관왕인 셈이다. 나는 실험단계인 지독한 화학요법으로 치료해낸 림프종, 의사의 몇바늘 수술로 간단히 처리한 피부암, 중대하고 섬세한 수술을 해야했던 전립선 암과의 한판승을 겪어냈다. 이 모든 병은 내가 50세가 되기도 전에 닥쳐왔다.
1995년, 해변에서의 휴가 동안 나는 바다를 즐기기는 커녕 의사의 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전주에 한 연례 건강진단에서 시작됐다. 다른 검사와 함께 나는 디지털 전립선 검사와 전립선암 추적에 유용한 PSA 혈액검사를 마쳤고 이튿날 간호사는 전화로 "모든 것이 정상이며 PSA 수치는 3.9"라고 알려줬다. 수치가 정상이라고는 했지만 이는 작년 검사이래 수치가 1이나 상승한 것이었다.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의 마요 클리닉 연구에 따르면 연간 0.75의 PSA상승은 비정상이었다. 내 병력을 정확히 아는 나로서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나는 테네시주 낙스빌의 비뇨기과 전문의 폴 해처에게 연락, 상황을 설명하고 초음파 전립선 검사를 요청했다. 해처는 현미경 생체검사까지 했지만 초음파검사에서는 "의심스러운 부위"가 발견되지 않았다. PSA가 상승된 3명중 1명이 전립선 암을 앓지만 50세전에 세 번의 암에 걸리는 사람은 아마도 10만명의 1명 정도 될 것이었다. 그러나 드문 확률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다른 암과의 전쟁에 대한 강한 예감을 가졌다.
마침내 해처가 전화했다. 전립선 암이었다. 내 글리슨 수치(현미경으로 검사한 전립선 암의 분석에서 나오는 수치)는 6으로 중간이지만 내 나이에는 치료가 필요했다. 또한 암의 전이 여부 확인을 위해 CAT 스캔과 뼈 스캔이 필요했다. 20년전 아버지도 전립선 암의 전이로 돌아가셨었다. 과연 나도 똑같은 사형선고를 받는걸까?
그날밤 나는 낙스빌로 가 검사받기로 결정했다. 병원에서 의사의 X-레이 판독을 기다리는 것은 사형선고 공판서 배심원의 평결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의 생존여부를 알려주는 상황이기 ㄸ문이었다. 해처는 X-레이를 면밀히 검사하고 "암의 전이 흔적이 없다"고 말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게 해처는 방사선 치료, 전립선 내 방사능 알약 투입, 전립선 제거 수술의 3가지 선택사항을 제시했다. 해처는 "방사성 치료는 복잡하지 않아서 환자들이 선호하지만 수술보다 낫다는 증명은 10년이 넘도록 나타난 바 없다"고 설명했다. 반면 암이 모인 전립선의 제거는 효과가 좋은 편이었다. 대수술이긴 하나 수술 직후 요실금외엔 부작용이 없었고 발기불능의 위험이 따르는 수술이었다.
해처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 결정하라고 말했다. 그는 수술을 원하면 년간 50회이상, 최소 100회이상의 수술 경험이 있는 의사를 선택하라며 최고의 의사 명단을 줬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조사에 들어갔다. 의료기관에 전화하고 15-20명의 연구진과 대화, 책과 테입, 의학 연구보고서 등을 검토, 나는 수술을 결심하고 집도의로 볼티모어 존스 홉킨스 병원의 패트릭 월쉬를 선택했다.
월쉬가 수술전 전립선을 바늘 생체검사로 자극, 정상 상태로 돌려 좋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5주를 기다려 수술을 받게됐다. 그동안은 정상적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하면서 수술 대비해 혈액도 준비하고 유서도 새로 작성하고 보험도 확인하고 남은 일도 정리했다. 나는 또한 항암 작용이 있다는 녹차를 하루 6-7잔씩 마셨다. 나중에 보니 내가 마신 녹차는 항암작용을 하는 카테신을 제거한 녹차였다. 하지만 녹차를 마시는 동안 나는 내가 무언가 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얻었다.
수술을 위해 아내 도로시와 나는 볼티모어로 떠났다. 월쉬는 수술과정과 위험, 수술 후 치료 등을 설명했다. 수술당일에는 오전 4시에 일어나 관장을 하고 6시30분에 대기실에 들어갔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내가 깨어있었다는 것은 기억하지만 과정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나중에 한 젊은 의사가 내가 수술중 전립선 암 통계를 중얼거렸다고 놀렸다. 수술에서 깨어나자 아내는 "수술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해줬다. 수술 3일 후 마지막 병상 리포트를 검토한 월쉬는 "수술이 깨끗이 끝나 모든 것이 완벽하며 전립선 외에 암세포도 존재하지 않고 성적 능력을 콘트롤 하는 두 신경도 멀쩡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줬다.
5일만에 나는 퇴원했다. 4주동안은 방광에서 소변을 뽑아내 받아내는 관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러나 내 집에서 편안히 쉬며 아이들의 소리를 듣는 것은 더할 나위없이 기쁜 일이었다.
수술 후 암세포 전이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PSA 테스트였다. 그 수치가 0이 아니면 암세포가 전이됐다는 증거였다. 10주후 실시된 내 PSA 테스트 수치는 0이었다. 좋은 뉴스를 기대했었지만 이를 확인하는 것은 나를 더욱 기쁘게 했다.
쉰 전에 암을 세 번이나 겪었지만 나는 저주받았다기보다 축복받았고 매우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음과 만나는 "나쁜 소식"을 접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는 60-70세까지는 벌어지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젊고 "나쁜 소식"에서 살아난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암과 같은 치명적 질병은 인생과 그 목적을 뚜렷이 아로새겨준 축복이다.
일부 암환자들은 암이 자기를 점령하고 삶을 지배하도록 둔다. 이들은 가족과 친구에게서 자신을 멀리하고 심리적으로 항복한다. 최악을 기대하며 이 기대를 수행해낸다.
그러나 질병을 인생의 새 의미를 찾는 계기로 삼는 사람도 많다. 지금도 두렵고 혼란스런 세 차례 암의 기억은 생생하지만 암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의 내다보던 순간은 잊고 싶지 않다. 내가 이 기억을 없앤다면 암이 내 인생에 부여한 역설적인 축복, 즉 목표의식과 중심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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